평생 역사를 연구한 60대 류시현은 『역사를 읽는 법』 머리말에서 “계속 여러 책을 읽고 있다. 그렇지만 역사가 무엇인지 명확히 설명하지 못하겠다. 게다가 역사가의 역할과 임무가 무엇인지에 관해 여전히 고민하게 된다.”라고 고백한다. 그리고 책을 마무리하며 맺음말에서 “생각을 유연하게 하고 싶다. 생각이 유연한 것은 균형 감각을 가지는 것을 의미한다. 나의 삶, 나의 판단, 나의 결정 등을 정답이라고 주장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다짐한다. 한 생을 다해 역사를 통찰한 연구자의 말이라고 하기엔 자기 주장이 없어 겸손하게 들리지만 인간과 세상을 바라보는 태도로는 지나치지 않다. 균형과 절제를 잃은 관점과 태도는 폭력과 증오를 낳고 상대를 인정하는 기본기를 상실하기 마련이다. 도대체 역사란 무엇인가.
줄리언 반스는 역사적 ‘사실’에 상상력을 보태 소설적 ‘허구’를 빚어낸다. 한없이 자유롭고 무한한 가능성이 펼쳐진 소설과 달리 역사는 객관적 사실 여부를 고증하는 데서부터 출발한다. 진실은 해석의 문제이나 사실은 합의의 과정이 아닐까. 이 책이 출간 당시 서점 역사 코너에 전시됐다는 웃지못할 에피소드가 전해진다. 줄리언 반스는 왜 소설의 제목을 세계 역사라고 했을까.
노아의 방주, 시오니즘과 테러, 체르노빌 원전 사고, 타이타닉호 침몰, 달 착륙에 이르기까지 인류의 역사에서 소설처럼 떠오르는 장면에 숨을 불어 넣었다. 역사적 사실과 다른 소설적 진실이라는 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차치하더라도 독자에겐 호기심과 재미 이상의 무언가를 요구하는 듯하다. 이 글을 읽고 아무생각도 하지 않는다는 게 가당키나 하단 말인가, 라고 강요하듯 줄리언 반스는 역사의 한 장면을 미분하여 그 의미를 적분한다. 그 중에서도 제5장 「난파」가 인상적이다. 세네갈 원정대(1816.06.17.) 365명의 운명을 다룬 테오도르 제리코의 <메두사호의 뗏목, 1819>은 누구나 한 번쯤 보았던 그림이다. 영화나 드라마 보다 극적인 사건을 다룬 그림을 다시 생생한 소설로 묘사한 이유는 궁금하지 않다. 읽는 이에게 미적 황홀감을 주거나 역사를 환기할 목적이거나 현실을 재현하려는 욕망이거나 상관없이 줄리언 반스의 이야기는 과거를 소환해 현실을 살피게 한다. 물론 오래된 미래는 살아남은 자들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