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로 읽는 정신분석 - 김서영의 치유하는 영화읽기 일상인문학 2
김서영 지음 / 은행나무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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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질과 현상은 무관할까. 대한민국 감독 중 유일하게 세계 3대 영화제에서 수상한 김기덕의 영화는 감독의 삶과 분리될 수 있을까. 2007년 초판이 나왔고 2014년 개정판을 읽었다. 그리고 독서 모임 현장에서 책 두께를 비교하며 목차를 비교했고, 김기덕과 봉준호의 영화 등 무려 90쪽이 삭제된 또 다른 2021년 판본을 확인했다. 17년간 한 명은 나락으로 떨어져 코로나로 객사했으며 한 명은 흥행과 작품성 두 마리의 토끼를 잡은 감독으로 성장했다. 김서영의 평가는 현실과 상반됐고, 개정판을 거쳐 사라진 텍스트 안에서만 숨 쉬고 있을 터. 물론 모임에서는 두 감독에 대한 평가나 영화 이야기보다 인간의 심리와 정신분석에 관한 이야기가 주를 이뤘다. 눈에 보이는 것과 귀에 들리는 것은 수동적이고 피동적인 감각이다. 주체적으로 보고 듣는 행위와 구별된다. 같은 영화를 보면서 보고 듣는 것이 다르다. 같은 코스를 여행해도 전혀 다른 걸 보고 듣고 맛보는 것처럼. 인간의 마음은 그렇게 제각각 흐르며 정서적 반응을 통해 이성을 뒤흔들기도 한다. 합리적 판단과 논리적 분석은 그래서 때때로 공허하다.

모임 전 《조커 2》를 함께 보았다. 고담시의 어둠과 음산한 분위기를 압도하는 호아킨 피닉스의 연기는 어떤 표현으로도 담아내지 못할 듯싶다. 한 배우의 존재감이 서사를 지배한다. 뮤지컬 형식에서 호흡을 맞춘 레이디 가가조차 점으로 만들어 버리는 느낌이다. 지나친 재능은 독이 되고 타고난 외모와 분위기가 연기의 한계를 만들기도 하지만 그것을 극대화하거나 뛰어넘는 영화를 만나기도 한다. 내용, 전개, 구성, 시각적 효과 등과 무관하게 조커의 몸짓과 표정에 집중했다. 부모의 양육 태도, 유년 시절의 트라우마가 한 인간의 인생을 좌우한다는 운명론적 세계관에 동의할 수는 없다.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칠 수도 있고, 몇몇은 그 상처가 인생의 터닝 포인트가 될 수도 있으나 대개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며 시간은 상상할 수 없이 많은 것들을 먹어 치운다. 프로이트의 리비도, 융의 집단 무의식으로 조커라는 캐릭터를 분석하는 일은 헛되고 헛될 수도 있다. 우리의 관심사는 언제나 ‘나’의 지금-여기다. 상징계에 머물며 상상계를 살지만 실재계를 추구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영화는 여전히 현실도피의 공간이 아니라 충족하지 못한 욕망의 탈출구이거나 실현할 수 없는 걸 알면서도 꿈꿀 자유를 확인하는 시간이다. 물론 조커를 보며 공감과 몰입을 하는 관객도, 안도와 샤덴프로이데를 느끼는 관객도 있었을 것이다. 같은 영화, 다른 생각들이 결국 라캉이 말한 주이상스를 확인하는 방법이 아닐까.

김서영은 정신분석을 공부했다. 영화는 분석의 대상이자 도구다. 프로이트와 융, 라캉과 지젝을 앞세워 정신분석과 분석심리, 히스테리와 강박을 설명하고 상징계와 상상계와 실재계의 구조를 파악하려 애쓰지만 그 개념조차 생소한 독자들에겐 낯설기만 하다. 영화를 보는 다양한 관점은 존중되어야 마땅하고 각각의 관점과 준거 틀이 충돌하는 지점을 들여다보는 일은 흥미롭지만, 영화를 ‘재미와 감동’ 이외의 수단으로 삼지 않는 대부분의 관객들에겐 시집 뒤에 붙은 해설, 소설 뒤에 붙은 비평만큼 헛되고 헛될 수도 있다.

지나간 영화를 떠올리며, 새로운 영화를 소개받으며 인간의 ‘심리’에 대해 들여다보는 기간의 텍스트로는 부족함이 없었다. 영화는 때때로 소설처럼 우리 자신을 비추는 거울의 역할을 하니까. 어떤 자세로 영화를 보든, 실존 인물이 아닌 영화 속 캐릭터에 몰입하든 돌아보는 건 결국 ‘나’와 관계들 그리고 현실과 미래일 테니까.

꿈의 조각을 항상 한 주머니에 넣고 사는 것, 그것이 바로 자신을 보살피는 방법입니다. 어떤 방식으로든 생활의 어딘가에 마음을 기쁘게 하는 일이 놓여 있다면 우리는 이로부터 삶의 에너지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 34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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