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해서는 이쯤 해두자.’
놀랍게도, 각 장마다 반복되는 ‘이쯤 해두자’는 마지막 문장 앞에서 한참을 서성인다. 아리스토텔레스조차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했고, 모두 설명하거나 일일이 밝힐 수 없는 것은 다음을 기약했다. 이것은 대충 마무리하자는 태도와 전혀 다르다. 최선을 다해 정교하게 분석하고 사례를 들어 증명한 후에도 이해되지 않는다는 독자 혹은 상대를 위한 마무리다. 안되면 될 때까지,라는 불굴의 정신은 무모함 혹은 집착일 수도 있다. 이쯤 해두자는 건 더 쉽게 설명하거나 구체적으로 알려줘도 넌 알 수가 없을 거라는 포기와 조롱이 아니다. 제 나름의 경계와 기준을 설정하지 않으면 길을 잃기 쉽고 어디가 끝인지 알 수 없는 늪에 빠질 수도 있다는 경고처럼 들린다.
왜 아니겠는가. 당시에 수사학은 청중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설득의 기술이자 출세의 수단이었으니 긍정과 부정, 두 개의 시선이 교차했다. 소피스트와 플라톤이 그랬다. 상대를 설득하는 대화법은 인간관계, 처세술, 비즈니스 등 세상을 살아가며 꼭 필요한 능력이다. 하지만 합리적 이성을 바탕으로 논리적 근거를 제시하면 감정에 호소하는 오류를 범하지 않을 수 있으나 사람의 마음을 얻기 어렵다.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라고 하지만 대개 감정으로 판단을 흐리고 합리적 선택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는 사실이 숱한 심리학 실험과 경제학 이론으로 확인됐다. 특히 대화와 토론에 개입되는 상대방에 대한 호감 정도, 감정적 판단, 정치와 종교적 신념 등은 수사학을 무용지물로 만들기 쉽다. 물론 아리스토텔레스도 3권으로 나누어 기술하는 수사학 중에서 2권에 ‘감정’을 집중적으로 다룬다. 테크닉을 가르치는 대신 수사학이 학문으로서 정착될 수 있는지 점검한 후 구성요소를 확인하고 필요성을 역설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심의용, 법정, 과시용 등 연설을 세 가지로 나눠 설명하고 정체에 따라 수사학의 역할과 의미를 설명하며 모든 연설의 공통 근거로 ‘예증’과 ‘생략삼단논법’을 제시한다. 싸움의 기술, 연애의 기술처럼 특별한 팁을 주거나 쉽게 배울 수 있는 비법을 전수하는 대신 인간의 이성과 감정을 살펴 합리적 이성의 지평을 넓힌 것이다. 심리적 편향과 숱한 오류로 허우적거리는 평범한 사람들의 말싸움과 자기주장과 감정의 배설을 우리는 매일 경험하며 산다. 그렇다고 수사학이 특별한 사람들을 위한 논리 도구라는 의미는 아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가 아니라 어떤 선택이 합리적이며 공공선에 부합하는지 살펴야 한다. 시대정신에 걸맞은 목적과 가치에 합의하는 길은 멀고도 험하지만 포기할 수 없다. 수사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그토록 강조하고 싶었던 말은 ‘이쯤 해두자’가 아니라, 아직도 그쯤에 머물러 있는지에 대한 질문일지도 모른다.
아주 오랜만에 다시 읽는 ‘시학’은 새삼스럽다. 서사시와 극의 차이를 확인하기 위해 이 책을 읽는 사람은 없을 테지만 ‘시학’은 그리스 고전을 꼼꼼하게 살펴보고 아이스킬로스,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의 비극과 오딧세이, 일리아스를 읽었다는 전제를 바탕으로 한다. 특히 필연성과 개연성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고 말하는 듯하다. 황당한 서사보다 견디기 어려운 건 ‘마침 바로 그때’ 같은 사건의 우연성과 개연성 없는 허구다. 여전히 통용되는 원칙들이니 고전을 반복해서 읽는 이유는 결국 보편성 때문이다. 통시적 관점에서 일관되게 적용되는 기본들. 시간을 견딜 수 있는 건 생각보다 많지 않다. 고전의 힘은 결국 깊은 사유와 장기적 안목 그리고 이성에서 발원한다.
“비극의 즐거움은 ‘연민과 공포’에서 비롯되며 시인은 모방으로 이런 즐거움을 산출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