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나의 그림 읽기 - 알베르토 망구엘의
알베르토 망구엘 지음, 강미경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04년 3월
평점 :
품절
그림에 관심을 갖게 되는 계기는 개인마다 다르다. 그림은 미술의 한 분야이지만 때때로 예술을 대표하기도 한다. 통념상 미술하면 그림을 떠올린다. 조각이나 건축도 미술에 포함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림은 그만큼 사람들에게 절대적인 예술적 위치를 점유하고 있다. 어린 시절에 수많은 시간들을 그림 그리기에 할애한다. 목적도 이유도 없다. 그림은 그저 하나의 놀이이고 유희일 뿐이다. 그것이 실용적인 목적으로 초상화나 종교화와 결합되었고 예술의 중추로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실용적인 목적이든 예술적인 목적이든 우리는 그림을 외면하고 살아갈 수는 없다. 다만 박물관과 전시관 속에 박제되어 버린 예술 작품들을 찾아다니며 관람해야 하는 번거로움은 새로운 예술의 향유 방식이기는 하다. 내가 내 발로 미술관을 찾아간 것은 10년도 되지 않는다. 슬픈 일인지 모르지만 책을 통해서 그림과 예술에 흥미를 느꼈고 직접 찾아보고 싶은 욕망이 생기기 시작했다. 예술의 전당이나 서울시립미술관에 전시회나 덕수궁, 인사동 전시회는 기회가 될 때마다 찾게 된다. 사진이나 다른 전시회도 마찬가지지만 막연한 감상 속에서 부딪히게 될 희열이나 정서적 충격을 기대하는 것은 쉽지 않다. 예를 들어, 덕수궁에서 합스부르크가에서 소장했던 비엔나미술관의 그림들을 보면서 당시와 역사와 왕가의 계보를 모른다면 얼마나 미적 감흥을 느낄 수 있을까 싶었다. 중간 중간 배경 지식을 깔아 놓기도 했고 오디오 설명기계도 비치해 놓았다. 구석구석을 들여다보도 감상하고 확인하는 그림 감상 방법은 상징과 알레고리로 똘똘 뭉쳐진 그림들의 해석 방법이다. 시대와 그림에 따라 감상 태도와 방법이 달라지는 것이다.
알베르토 망구엘의 <독서의 역사>는 책에 관한 책으로 손 꼽을 만한 책이다. 학문과 예술을 넘나들며 유목하는 지식인들이 부럽기만 하다. 우리와 다른 지적 풍토 때문인지, 교육환경 때문인지 모르지만 바다 건너편에는 그런 인간들이 많다. 진짜 부럽다. 단순 비교를 통해 그들의 비교우위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지적 편력에 대한 호기심과 동경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는데 망구엘의 눈을 빌려 몇 명의 작가를 살펴보고 몇 장의 그림을 이해하는 일은 중요하지 않다. 그가 말한 것처럼 내 방식대로 예술을 이해하고 바라보는 안목이 중요하다. 그것은 내 삶을 풍요롭게 하거나 타인과 사회를 바라보는 포용적인 시선과 넓은 시야를 가능하게 한다.
이 책에는 조앤 미첼의 <두 대의 피아노>, 로베르 캉팽의 <화열 가리개 앞의 동정녀와 아기 예수>, 티나 모도티의 ‘무제’, 라비니아 폰타나의 <토니나 초상화>, 메리애나 가트너의 <서 있는 네 사람>, 필록세누스의 <이수스의 전투를 묘사한 모자이크화>, 파블로 피카소의 <통곡하는 여인>, 알레이자디뉴의 ‘성 베드로 조각상’, 클로드-니콜라 를두의 ‘아르케스낭’, 피터 아이젠만의 베를린 홀로코스트 기념관 모형, 가라바조의 <일곱 가지 자비스런 행동>에 대한 저자의 감상을 적혀 있다. 저자의 박학과 다양한 인문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시대의 흐름과 문화적 배경은 물론 문학과 역사를 아우르는 공시적, 통시적 관점의 시선들이 다채롭게 펼쳐진다.
한 작가의 한 작품을 중심으로 작가의 작품 세계와 그를 둘러싼 주변 풍경을 재미있게 보여준다. 특별한 형식 없이 자유롭고 편안하게 풀어나가는 글이기 때문에 지루하지 않고 편안하게 그림들을 즐기며 감상하는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인쇄 상태와 지질이 양호하기 때문에 조잡하지 않다. 편안한 음악과 마음의 여유가 있다면 이 책과 함께 해도 좋겠다. <독서의 역사>에 대한 좋은 기억과 강유원의 추천을 믿고 본 책이다. 책을 선별하고 도서목록을 만들어 나가는 일은 즐거움이면서도 어려운 일이다.
미술에 관한 많은 책들이 있지만 그 책이 도구가 되어 예술을 제대로 이해하게 되는 안목이 길러진다면 나름대로 좋은 책이라고 할 수 있다. 단순한 해설이나 주관적인 감상, 배경지식의 나열을 통해 독자들에게 좋은 안내자가 될 수도 있지만 해설서 이상의 의미를 찾을 수는 없다. 그래서 저자는 이런 말을 한다.
예술작품은 우리에게 감동과 영감을 주는 창조행위다. 그림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결코 말로 다 표현할 수는 없다. 물론 예술작품은 해석될 수 있다. 왜냐하면 그것도 역시 경험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의 이해를 초월하는 예술작품의 본성 때문에 완전하고 결정적인 해석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예술작품은 많은 것을 시사하면서도 동시에 애매모호한 특성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 P. 230
수전 손택은 ‘해석은 지식인이 예술에 가하는 복수’라고 표현했다. 하지만 저자는 예술작품은 해석될 수 있다고 말한다. 경험의 산물이기 때문이라는 근거가 설득력을 얻기 위해서는 작품에 대한 타당한 설명과 감상들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서로 다른 견해를 밝힌 두 사람의 관점은 조금 다르다. 하지만 영원히 해결되지 않을지도 모를 문제이다. 그것은 관찰자 혹은 독자 개개인의 취향의 문제이기도 하다. 알고 보든, 보는 것만으로 느끼든 예술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와 진실은 다양하게 변주될 것이다.
그것이 단 하나의 해답을 품고 있거나 직관적인 감상만 가능하다면 예술은 더 이상 예술이 아닐 것이다. 현실과 예술의 관계, 해석과 감상의 문제는 이 책을 읽어나가면서 조금씩 생각해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가을이 깊어간다. 자연보다 아름다운 예술은 없다. 자연에 대한 모방과 외경에서 예술이 출발한 것은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만큼 창 밖에 가을비가 아름답다. 이 비 그치고 나면 푸른 하늘과 하얀 구름을 보여주겠지만.
그림이든 조각상이든 결국 모든 형상은 망막을 현혹시켜 발견이나 기억의 환상을 야기하는 얕은 속임수에 지나지 않는다. 이는 마치 우리가 입자 하나하나마다 우리의 얼굴과 목소리를 담고 있는 미립자로 이루어진 무한소의 나선에 불과한 것과 마찬가지다. - P. 432
운이 좋다면 우리는 그 안에서 진실의 작은 조각을 발견할지도 모른다. 어떤 책을 막론하고 예술작품 속에 담긴 진실을 따라잡기에는 한계가 있는 듯하다. 반신반의하면서 되는 대로 아무렇게나 적어 내려간 이 책도 예외가 아니다. - P. 432
071019-1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