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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 뛰는 삶을 살아라
다릴 앙카 지음, 류시화 옮김 / 나무심는사람(이레) / 1999년 3월
평점 :
절판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는 아니다. 하지만 눈에 안 보인다는 이유로 사기를 치는 사람도 많다. 보이지 않는 존재, 만져지지 않는 실체에 대한 믿음은 신에 대한 믿음과 유사하다. 그 믿음에 대한 이유와 목적이 서로 다를지도 모르지만 유사한 면이 많다. 뉴에이지에 관한 음악과 명상 등 관련 분야가 하나의 산업이 될 정도로 성장했다. 삶에 긍정적인 역할을 하고 낙관적 전망을 위한 도구로서 역할을 하기도 하지만 어쩐지 내겐 공허하고 무기력한 현실 도피로 비춰진다.
친구의 권유가 손에 잡은 아릴 앙카의 <가슴 뛰는 삶을 살아라>는 일단 믿을 수 없다. 류시화가 번역 소개한 이 책은 일반인을 대상으로 영적인 존재와의 대화를 질문과 대답 형식으로 풀어놓은 책이다. 인도인 다릴 앙카는 외계의 영적인 에너지를 만나게 되는데 그를 바샤르라고 지칭하고 있다. 이 바샤르가 다릴 앙카의 몸을 빌어 일반인들의 질문에 답하는 내용을 책으로 묶었으니 일단 호기심을 이끌어 내는 데는 성공했다.
바샤르가 존재한다는 아사사니는 눈에 보이지 태양계 바깥의 우주에 존재한다고 스스로를 밝힌다. 수킬로미터 크기의 우주선을 타고 다니기도 하며 UFO와 같은 실제 존재를 믿지 않는 인간들을 설득하기도 한다. 사람들이 주로 하는 질문은 인간의 삶과 죽음 이후나 영혼의 관한 질문들이다. 바샤르는 성실하게 이 질문에 대답하며 그 실체를 인정받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바샤르라는 존재가 채널링을 통해 일본에서 일반인들과 만나 나눈 대화의 방식이 아니라 그가 지구에 대해 혹은 인간의 삶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다는 사실이다. 사람들은 먼 우주의 신비한 존재에게 자신의 삶과 고민을 털어놓고 삶의 길을 묻고 있다. 그가 답을 줄 수 있다는 생각도 재미있지만 진지하게 경청하는 모습을 상상하니 웃음이 절로 난다. 조소나 냉소가 아니라 그저 허탈한 웃음이다. 참 삶의 방법과 길은 알 수 없으니 별의별 방법이 다 동원되는 것은 아닌가 싶다. 나는 물론 바샤르의 존재를 믿지 않는다.
바샤르는 버뮤다 삼각지대를 외부와의 통로라고 말한다. 그리고 아틀란티스 대륙도 실제한다고 말한다. 무엇이라고 말하기 어렵지만 신뢰도에 문제가 가는 대목이다. 아니라고 부정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긍정할 수도 없는 일이다. 있다는 증거도 없고 없다는 확증도 없다. 세상에는 알 수 없는 일도 많지만, 알 수 없다고 사람들을 미혹케 하는 일도 많다. 물론 과학적 사고와 합리적 이성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없다. 그러니 신비주의를 신봉하며 해결되지 않는 문제들을 모두 바샤르에게 물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특히 바샤르의 대답 중에 에이즈와 동성애에 관한 문제는 기가 막히다. 일종의 병이라고 파악하며 언젠가 미래에는 없어질 것이라고 판단한다. 인간에게 내재된 남성성과 여성성의 불균형으로 생긴 현상이라고 본다. 보수 기독교와 유사한 견해를 보이는 바샤르를 어떻게 볼 것인가의 문제를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구체적인 현실 문제를 묻는 다는 것이 그의 존재를 확인하기 위한 의심이니 믿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우습게 보일 수도 있지만 그에게 길을 묻는 일이 더 재밌다.
바샤르가 말하는 삶의 길과 방법은 한 마디로 요약된다. 제목이다. ‘가슴 뛰는 삶을 살아라’가 그것이다. 하고 싶은 일을 해라. 가슴 뛰며 할 수 있는 일을 하며 사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는 영원한 존재이다. 우리는 하나의 존재가 아니라 우주 여러 곳에 존재한다. 죽음은 존재의 소멸이 아니라 영혼의 육체 이탈에 불과하다. 다른 곳에 다시 존재하게 된다. 다치바나 다카시의 <임사체험>에서 품었던 의문과 유사하면서도 다른 견해가 곳곳에 보인다. 일본에서 벌어진 이 대화의 내용들을 놓고 논의하는 것은 어쩌면 부질없다. 사람은 누구나 믿고 싶은 것을 믿으며 살고, 믿고 싶지 않은 사실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하기 때문이다.
유한한 인생을 살면서 영원한 존재를 생각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욕심일 수 있겠다. 하지만 우리가 태어난 이유와 삶의 방법은 아무도 모른다. 먼저 살았던 사람들을 통해서 우리는 교훈을 얻을 수밖에 없다. 실제 이 땅에 발 딛고 서 있는 수많은 사람들을 생각하고 그들이 살아온 과거에서 길을 물어야 한다. 내 손으로 모두 해결 할 수 없어도, 나의 고민은 여전히 ‘지금-여기’에 있다.
새털구름 가득한 푸른 가을 하늘을 올려다보며 이 땅에 없는, 눈에 보이지 않는 저 먼 곳에서 온 존재가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 보았다. 그러나, 현실에서 해결하지 못하고 찾지 못하는 길을 먼 곳에서 구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뉴에이지는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는 세기말의 신비주의가 아니라 마음을 다스리고 맑은 정신을 가질 수 있는 방법이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음악이든 책이든 도구에 불과한 것은 아닌가. 무엇을 위해 살든 그것이 무엇이든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는 여유만으로도 세상은 다르게 보일 수 있다. 내가 찾는 것이 먼 곳에 있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그것을 얻을 수 있는 방법과 길을 여전히 책에게 묻고 있으니, 한편 서글프기도 하다. 그래도 나는 여전히, 책을 볼 때 가슴이 뛴다.
071012-1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