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의 공동체 - 민족주의의 기원과 전파에 대한 성찰 나남신서 377
베네딕트 앤더슨 지음, 윤형숙 옮김 / 나남출판 / 2003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우리는 민족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조상의 빛난 얼을 오늘에 되살려 안으로 자주독립의 자세를 확립하고, 밖으로 인류공영에 이바지할 때다. 이에 우리의 나아갈 바를 밝혀 교육의 지표로 삼는다......”로 시작하는 국민교육헌장을 외워보았다. 첫 번째 문장을 자신있게 외웠고 뒤에 문장은 더듬더듬 기억이 났다. 초등학교 시절에 뜻도 모르고 열심히 암기했던 문장들이 하나 둘씩 떠오른다는 사실이 놀랍기도 하고 두렵기도 하다.

  1968년 12월 5일에 박정희가 반포한 ‘국민교육헌장’은 취지와 의도와 무관하게, 앞부분에 ‘민족’을 내세우고 있다. 민족을 중흥하겠다는 국민교육의 목표는 ‘상상력’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이 베네딕트 앤더슨이 <상상의 공동체>에서 내세우는 핵심적인 주장이다. ‘민족주의 기원과 전파에 대한 성찰’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었던 책의 개정증보판을 원제대로 나남출판에서 2002년에 출판했다. 월드컵의 광풍(?)이 몰아치던 시기였기 때문에 ‘민족주의’에 담론들이 넘쳐났고 보이지 않는 열기로 가득했던 한반도의 상황들을 돌아보는 데 유효한 저작이다.

  우리가 맹목적으로 믿고 있는 민족이라는 개념에 대해 의심해 본적이 없다면 베네딕트 앤더슨의 이야기는 놀라움으로 가득해 보일 것이다. 종교적 공동체와 언어 공동체로 양분할 수 있었던 사람들을 근대화 과정에서 자본주의의 발달과 더불어 ‘민족’이라는 개념으로 묶기 시작했다는 사실은 근대적 의미의 ‘국가’의 성립과 그 궤를 같이하고 있다. 지역적 특성을 토대로 국가와 민족은 하나가 되었으며 단일 민족이 하나의 국가를 이루지 않더라도 실체가 분명하지 않은 문화적, 언어적 공통성을 유지하고 있는 사람들의 애국심과 인종주의는 ‘문화적 조형물’로 이루어진 역사적 공동체일 뿐이다.

  민족은 본래 제한되고 주권을 가진 것으로 상상되는 정치공동체이다.
  민족은 가장 작은 민족의 성원들도 대부분의 자기 동료들을 알지 못하고 만나지 못하며 심지어 그들에 관한 이야기를 듣지도 못하지만, 구성원 각자의 마음에 서로 친교(communion)의 이미지가 살아있기 때문에 상상된 것이다. - P. 25

민족은 제한된 것으로 상상된다. 왜냐하면 10억의 인구를 가진 가장 큰 민족도 비록 유동적이기는 하지만 한정된 경계를 가지고 있어 그 너머에는 다른 민족이 살고 있기 때문이다. - P. 26


  문화적 기원을 통해 ‘민족’의 의미와 기원을 살펴보는 작업은 보이지 않는 인종간의 결속력의 근원을 살펴보는 일이다. 과연 민족의식의 기원은 무엇인가?  식민지와 제국주의자들을 중심으로 크리올이라 불리우는 식민지 이민자들의 의식을 통해, 혹은 식민지의 원주민들의 의식을 통해 저자는 민족주의의 한계와 계급성을 드러내고 있다. 자본주의의 기원과 함께 민족주의의 개념이 기원이 밝혀진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 문제는 민족주의가 안고 있는 파시즘의 성격을 말한다. 생각해보면 파시즘적 민족주의가 내포하는 있는 불온한 의도는 다중의 의도와 신념을 빌미로 숨겨진 의도에 복무하고 있다. 숨겨진 의도는 민족주의를 내세워 체제를 공고히 하려는 소수 기득권층과 배타적 이기주의자들의 검은 속내에 감추어져 있기 마련이다.

  이 책에서 말하는 민족주의가 신자유주의 물결과 함께 어떤 양상으로 전개될 것인가는 지금 우리들이 주목해야 하는 부분이 아닐까 싶다. 국가간 경계가 모호해지고 다국적 자본이 유동적으로 움직이는 상황에서 과연 ‘상상의 공동체’는 유지될 수 있을 것인지 궁금하다. 객관적인 관점에서 상황을 파악하는 논리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이제는 전개된 상황을 정확하게 분석하고 능동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 나가야 하는 것은 아닐까? 민족은 언어와 종족을 넘어선 위치에 자리 매김하고 있으며 공고한 물적 토대를 바탕으로 확고부동하게 자리잡고 앉아있다. 쉽사리 무너질 것 같지 않은 이 거대한 괴물을 상대로 한 지난한 싸움들이 힘겹게만 느껴진다. 싸워 무너뜨려야 할 대상으로 파악해서도 안되겠지만 그 기원과 역할을 알지 못한 채 맹목적인 믿음을 고수할 수는 더더욱 없는 노릇이다.

  서장에서 밝히고 있는 민족에 대한 정의는 이 책 전체에서 저자의 주장을 견고하게 지탱하고 있다.

민족은 제한된 것으로 상상된다. 왜냐하면 10억의 인구를 가진 가장 큰 민족도 비록 유동적이기는 하지만 한정된 경계를 가지고 있어 그 너머에는 다른 민족이 살고 있기 때문이다. - P. 26

민족은 주권을 가진 것으로 상상된다. 왜냐하면 이 개념은 계몽사상과 혁명이 신이 정한 계층적 왕국의 합법성을 무너뜨리던 시대에 태어났기 때문이다. - P. 26

마지막으로 민족은 공동체로 상상된다. 왜냐하면 각 민족에 보편화되어 있을지 모르는 실질적인 불평등과 수탈에도 불구하고 민족은 언제나 심오한 수평적 동료의식으로 상상되기 때문이다. - P. 27

  아무것도 아닌 것들에 의해 미혹된 채 세상을 바로 보지 못하는 나에겐 너무나 많은 들보들이 눈을 가리고 있다. 걷어내고 부러뜨려도 누군가 색안경을 씌우고 안개를 뿌린다. 청명하게 맑은 시선으로 푸른 가을 하늘을 바라보고 싶다. 그것이 현실을 바라보는 가장 기본적인 준비라고 믿는다. 민족이라는 개념이 ‘상상된 공동체’이든 ‘문화적 조형물’이든 ‘역사적 실체’이든 상관없이 현실 속에 굳건하게 뿌리내리고 있는 편견과 왜곡된 의식은 쉽게 바로잡히지 않는다. 그것들을 극복하기 위한 작은 노력들을 시작해야 하는 것은 우리 모두의 몫이다.


071002-116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07-10-02 20: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10-02 23:21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