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님 가운데 토막 같은 말씀,이라는 표현을 이해하는 데도 한 생애가 필요하다. 자기 범죄를 부인하거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인간을 ‘용서’하는 일은 종교인도 어렵다. 타인을 향한 서운함에서 분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감정을 평범한 사람들은 어떻게 표현하고 처리할까. 인간의 본능에 가까우며 가성비 최고라는 ‘뒷담화’가 정답일까. 문제는 알고 외면하는 사람보다 무엇이 잘못인지 인지하지 못하고 자신의 말과 행동을 합리화하거나 인지부조화로 극복하는 인간이 더 심각하다. 물론 이 유형에는 나와 너 그리고 우리가 모두 포함된다. 공자님 가운데 토막 같은 사람도 견디기 어려운 세상이다.
마사 누스바움은 ‘타인에 대한 연민’을 가지라고 조언한다. 두려움과 혐오에 맞서는 대중 행동은 보복과 증오가 아니라 희망, 화해, 사랑이라고 강조한다. 포용적 연대를 지향해야 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게 아니라 실천하기 어려운 덕목이 아닐까 싶은 회의가 든다. 넓게는 정권 교체마다 반복되는 과거 청산 혹은 정치 보복에서 좁게는 연인과 친구, 가족은 물론 직장동료, 지인에 이르는 ‘관계’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갈등에 이르기까지 인류 사회는 적절한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문화와 관습에 따라 법률로 처벌하거나 공동체의 암묵적 질서로 배제하거나 개인적으로 보복하거나...
‘혐오의 시대를 우아하게 건너는 법’이라는 부제에 낚이지는 않는다. 그런 방법은 없기 때문이다. 모두 개싸움을 하는 시대에 혼자 우아하게 산다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상대가 진흙을 던지는 데 우아하게 대처한다는 발상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허나, 폭력을 폭력으로 이길 수는 없다. 개같은 상대를 개가 되어 물 수도 없다. 그래서 마사 누스바움은 ‘두려움’에 대한 철학적 성찰을 시도한다. ‘두려움의 군주제’라는 원제 뒤에는 우리의 정치 위기에 대한 철학적 고찰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저자는 ‘우아하게 건너는 법’ 따위를 언급한 적조차 없다.
현대인들은 사회경제적 지위가 불안해지고 계급과 계층 간의 갈등이 속출하며 기후 변화가 미래의 불안을 경고하는 시대를 지나면서도 우리는 여전히 ‘침묵’을 지킨다. 그것은 두려움의 다른 표현이다. 희망의 반대말은 절망이 아니라 두려움이라는 해석은 이 시대를 사는 우리를 향한 철학자의 경고다. 현실을 외면하고 회피하며 그럴듯한 포장지로 자기를 감쌀 때, 타인을 향한 혐오에 내 일이 아니라며 침묵할 때, 상대를 공격하고 제거함으로써 두려움을 해소할 때 아이러니 하게도 우리는 ‘희망’을 떠올린다.
이 책은 주로 미국 사회를 분석하고 있으나, 준거 집단을 미국으로 삼는 대한민국에도 거의 그대로 적용되는 이야기들이다. 정치적 분노, 차별과 혐오, 시기와 비난, 성차별과 여성 혐오 등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들에 대해 근본적인 원인을 살피고 분석하는 글이 부족한 현실에서 돈벌이에 혈안이 된 유튜버만 날뛴다. 분석과 해석이 아니라 감정의 배설과 증오 마케팅이 판을 친다. 이런 현실을 톺아볼 수 있는 차분한 시간, 넓은 안목과 사유의 도구를 제공하는 마사 누스바움의 태도는 시종 일관 차분하지만 날카롭다.
논리를 갖춘 객관적 태도는 아무나 가질 수 없는 숭고함이다. 글을 읽는 사람의 눈에 어떻게 비치든 타인과 세상을 바라보는 글쓴이의 관점과 태도가 냉정하고 합리적일 때 비로소 새로운 논의가 시작될 수 있다. 감정적 선동이나 정답을 제시하는 오만은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어떤 분야에서 어떤 직업을 갖고 일하든 마찬가지다. 겸손과 성찰은 기본이며 조심스런 태도로 좌고우면해야 실수를 줄이고 자기 성장을 지속할 수 있다. 오랜 시간 누적된 사유의 흔적들이 배어 있는 글은 어떤 형태로든 아름답다. 편안하게 읽히지만 뼈를 때리는 문장들 앞에서 잠시 숨을 고른다.
깊이 사고하기란 어려운 일이지만 두려워하고 비난하기란 쉬운 선택지다. - 3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