뭉크 - 노르웨이에서 만난 절규의 화가 클래식 클라우드 8
유성혜 지음 / arte(아르테)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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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람은 시간과 공간의 좌표 위에 자기만의 세계를 구축한다. 관점을 달리하고 안목을 넓히는 일은 쉽지 않다. 자기 삶의 목적과 가치는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데도 대개 직업과 연봉으로 비교 지옥에 스스로 몸을 던진다. 지금 당신은 어디에 서서 무얼하고 있는가. 지금-여기here and now에서 ‘나’를 지탱하는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나는 보이는 것을 그리는 게 아니라 본 것을 그린다.”라는 뭉크의 말은 왜 우리 삶에 통용되지 못할까.

1863년에 태어난 뭉크의 시간은 노르웨이 크리스티아니아(오슬로)에서 파리, 니스, 베를린을 지나 에켈리에서 1944년에 멈춘다. 그가 관통했던 시간과 공간들 - 세기말 데카당스, 벨 에포크, 제1차 세계대전, 나치 점령, 노르웨이 피오르, 니스의 햇빛, 몬테카를로의 카지노, 북유럽의 추위와 강렬한 햇빛 등. 알콜 중독과 도박, 불안과 고독으로 절규했던 뭉크는 행복이나 성공과 거리가 멀다. 어머니와 누이가 죽고 아버지의 학대에 가까운 종교적 규율로 죄책감이 가득했던 유년 시절의 흔적 때문인지 거의 모든 인간 관계에 실패한다. 오로지 그림에 대한 열정 하나로 80년을 버틴 삶이 경이롭다.

뭉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절규>보다 <아픈 아이>를 한참 들여다봐야 한다. 말년에 그린 <별이 빛나는 밤>, 다그니 율을 그린 <마돈나>, 강렬한 첫사랑의 추억으로 남은 유부녀 밀리와의 <키스>가 뭉크의 절규다. 붉은 석양이 인상적인 에케베르그 언덕의 <절규>는 자연의 비명이다. 유성혜는 『뭉크』에서 “절규. 누가 처음 한국어로 번역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노르웨이어 스크리크Skrik는 있는 힘을 다하여 부르짖는 ‘절규’보다는 너무 놀라 지르는 외마디 소리인 ‘비명’으로 해석하는 게 더 적절하다. 이 그림을 더 정확히 이해하는 데도 ‘비명’이라는 단어가 도움이 된다. 많은 이들이 오해하듯, ‘절규’라고 번역한 사람 역시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이 소리를 내는 것으로 생각한 것 같다. 그러나 뭉크의 노트에 따르면, 소리를 내는 쪽은 인물이 아니라 자연이다.”라고 설명한다. 기나긴 겨울의 혹독한 추위와 더움을 견뎌야 하는 노르웨이라는 공간적 상상력을 배제한 채 뭉크를 이해할 수는 없다.

불안과 공포, 외로움과 고독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뭉크는 공황 장애, 불면증, 정신 분열, 불안 장애, 환각, 피해망상 등 거의 모든 정신병적 증상들을 그림에 담아냈다. 낸 뭉크에 열광하는 사람은 위험하다. 뭉크의 그림을 통해 무엇을 읽어내든 그의 그림이 어떠하든 사람들은 각자의 관점으로 ‘본다.’ 에피파니epiphany는 ‘우연한 순간에 귀중한 것과의 만남이 주는 깨달음’을 의미한다. 호르몬이 우리 삶의 실질적 지배자라는 의학적 관점은 서글프지만 부정하기 어렵다. 의사 안철우는 호르몬과 미술의 만남을 에피파니가 아니겠냐는 듯 뭉크 씨에게 도파민 과잉이라는 처방을 내린다. 분노조절이 힘든 사람, 모든 게 남탓이고 자신의 말과 행동에 오류가 없는 줄 아는 사람, 언제나 주변 사람의 감정을 살피는 사람, 허무와 고독으로 무기력한 사람……. 이 모든 증상들은 어떤 호르몬이 부족한 걸까. 그림과 함께 적절한 음식과 처방을 달아놓은 『뭉크 씨, 도파님 과잉입니다』는 개인적 감상과 의학적 처방이 더해져 새롭지만 특별함은 없다.

『Edvard Munch』는 질 좋은 도록으로 충분하다. 김기태의 글에 대해서는 말하고 싶지 않다. 이리스 뮐러 베스테르만의 글은 그림과 어울려 『뭉크, 추방된 영혼의 기록』을 읽을만한 책으로 갈무리하게 만든다. “나는 자신의 심장을 열고자 하는 열망에서 태어나지 않은 예술은 믿지 않는다. 모든 미술과 문학, 음악은 심장의 피로 만들어져야 한다. 예술은 한 인간의 심혈이다.”라는 말로 뭉크를 설명한다. 뭉크는 심장을 열고자 하는 열망으로, 심장의 피로 그림을 그렸다는 의미다. 좋은 글은 뭉크의 그림과 어울려 읽고 보는 즐거움을 배가 시킨다. 수많은 자화상을 통해 인간 뭉크와 그의 예술 세계를 들여다본 이리스 뮐러 베르테르만의 색다른 관점과 통찰력이 빛난다.

석판화가 아닌 유화 <절규>를 보고 싶었으나 경매가 1,200억이 넘는 그림이 예술의 전당에 걸렸을 리 없다고 생각했다. 텍스트에 곁들여진 그림 혹은 그림에 설명으로 붙은 텍스트를 읽고 보며 뭉크의 <아픈 아이>, <키스>, <마돈나>, <뱀파이어>, <별이 빛나는 밤>만큼 자화상이 보고 싶어졌다. 이미경의 『뭉크의 별이 빛나는 밤』에서는 현지인으로 답사를 통해 뭉크의 흔적을 더듬으며 디테일하게 써내려 간 유성혜의 『뭉크』가 미처 담지 못한 이야기를 살펴볼 수 있다. 객관적인 정보와 설명이 충분하고 뭉크 전시회에 맞춰 출간한 책이라서 어렵지 않게 살펴볼 만하다.

화가의 삶에도 ‘사랑’만큼 강렬한 경험은 없다. 김연수는 『청춘의 문장들』에서 “청춘은 들고양이처럼 재빨리 지나가고, 그 그림자는 오래도록 영혼에 그늘을 드리운다.”라고 썼다. ‘청춘’을 ‘사랑’으로 바꿔 읽으면 뭉크의 그림에서 밀리, 다그니, 툴라의 그늘을 읽을 수 있다. 어머니와 누이 소피에, 아버지와 동생 안드레아스, 라우라 뿐만 아니라 어머니를 대신했던 카렌 이모까지 먼저 떠나보낸 뭉크의 생은 막내 여동생 잉게르가 정리한다. 숱한 메모와 기록들, 그가 몸담았던 크리스티아니아 보헤미안 그룹, 검은 새끼 돼지 클럽 사람들이 뭉크에게 준 영향과 흔적들까지 꼼꼼하게 살펴보면 뭉크와 그의 그림은 물론 당대의 사회, 문화를 함께 읽을 수도 있다. 지식과 정보가 넘쳐 그림 주변만 살피다 정작 스탕달 신드롬을 느낄 수도 있는 뭉크의 그림 앞에서 길을 잃을 수도 있다. 아무튼, 예술은 머리가 아니라 가슴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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