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옹 창비시선 279
정호승 지음 / 창비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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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틈

살얼음 낀 겨울 논바닥에
기러기 한 마리

떨어져 죽어 있는 것은
하늘에 빈틈이 있기 때문이다

  누구에게나 빈 틈이 있다. 가슴 속에 구덩이 하나씩을 파고 있는 것처럼. 그 빈 틈 때문에 정호승을 읽기 시작한 것은 아니었을까. ‘정호승’은 고교시절 나의 로망이었다. 열일곱에 그의 시집 <슬픔이 기쁨에게>, <서울의 예수>와 <새벽편지>를 읽으며 시에 눈뜨다. 2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그의 책이 나오면 어김없이 손이 간다. 조희봉처럼 ‘전작주의자’를 꿈꾼 적은 없지만 정호승의 책은 <서울에는 바다가 없다>라는 소설까지 읽었다. <서울의 예수>에 실린 시인의 서늘한 눈빛에 한동안 잠 못 이루던 시절이었다. 사춘기였고 한 시대를 어렴풋하게 감지할 수 있었던 감수성을 지닌 시기였다.

  김지하나 황지우, 오규원이나 김승희, 신경림이나 박노해 등 숱한 시인들을 만났지만 첫사랑을 잊지 못하듯 문학적 감수성 때문이었을 것으로 기억한다. 정호승은 언제나 낮은 목소리로 툭, 툭 내뱉듯 혹은 하늘을 바라보며 독백하듯 이야기한다. 날카롭고 예리한 눈빛만큼이나 사물에 대한 관찰과 시선이 농밀하다. 꼼꼼하고 세심한 시선은 대상에 대한 애정으로부터 비롯된다. 그것이 사물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 확대되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로 증폭된다.

  정호승의 빈 틈은 익숙한 것들을 낯설게 바라보는 곳에 있다. 그의 뛰어난 시편들에는 언제나 역설이 숨어있다. 아니듯 그렇고, 그러하지만 아무것도 아닌 것들 속에 숨어 있는 무언가를 끄집어 낸다. 진실은 사실에 앞선다. 객관적 정황들에 앞서 그가 보여주는 내면의 진실과 그 언어들은 솔직한 고백의 형태로 때로는 차갑지만 정확한 발언으로 빈 틈이 없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의 가슴은 고구마를 파는 청년처럼 언제나 군고구마 대신 기다림을 굽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밤의 연못

밤의 연못에 비친 아파트 창 너머로
한 소년이 방바닥에 앉아 혼자 라면을 끓여먹고 있다
나는 그 소년하고 같이 저녁을 먹기 위해
나도 라면을 들고 천천히 밤의 연못 속으로 걸어들어 간다
개구리 두꺼비 소금쟁이 부레옥잠 들이 내 뒤를 따른다
꽃잎을 꼭 다물고 잠자던 수련도 뒤따라와
꽃을 피운다


  그의 시선은 항상 낮은 것에 머물러 있다. 참여, 순수 논쟁이 뜨겁던 시절에 회색으로 몰리기도 했지만 세상이 둘로 나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시의 역할과 의미는 시인들마다 제 각기 다르게 해석한다. <슬픔이 기쁨에게> 시절부터 지금까지 줄곧 라면을 끓여먹는 소년에게 관심을 가져왔고 기쁨보다는 슬픔을, 웃음보다는 눈물을 사랑했던 시인이다.

  한 시인의 시적 경향이 다양하게 변모하면서 부침을 거듭하는 것을 볼 때마다 변화 없이 꾸준한 모습만을 보여주는 시인들을 볼 때마다 사람들은 다른 목소리를 낸다. 정호승의 목소리에 질릴 때도 되었지만 나는 여전히 그에 대한 무한한 애정과 관심을 가지고 있다. 시인 지망생이었던 후배 소설가 고원정이 어느 인터뷰에서 ‘정호승 시인이 내가 시를 통해 하고 싶었던 말들을 이미 하고 있기 때문에 시인의 길을 포기했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여전히 들을 만하다.

유등

등불 하나 강물에 떠나보내지 않고
어찌 강물을 사랑했다 하랴
강물에 등불 하나 흘려보내지 않고
어찌 등불을 사랑했다 하랴
떠나가지 않으면 떠나보내리라
흘러가지 않으면 흘려보내리라
강가의 가난한 사람들이
외로운 술집이 되어 가슴마다 술 마시는 밤
밤하늘을 헤엄치는 푸른 물고기들이
떼지어 강물에 뛰어내려 등불의 길을 따른다
부디 흐르는 강물에 칼을 꽂지 말아다오
누가 무너지는 촉석루를 껴안고 울고 있는가
지나가는 사람은 지나가게 내버려두고
떠나가는 사람은 떠나가게 내버려두고
유등(流燈)이여
그대 별들과 함께 서서 죽는 곳은 어디인가
나 흘러가면 돌아오지 않으리라
마지막 남은 등불 하나 바다에비치리라


  정호승의 시에 자주 등장하는 시어들이 있다. 밤, 하늘, 별, 강, 기다림, 사랑, 죽음, 가난 등이 그렇다. 서정시의 정의에 가장 근접해 있는 그의 시가 장수하는 비결이고 대중성을 확보하는 밑거름이다. 하지만 지루하지 않고 여전히 제 목소리와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은 그것을 바라보는 시인의 애정 어린 눈길이거나 진정성 때문이리라.

  언제나 완전한 시적 성취를 이룬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그의 시편들에서 읽어내는 완성도는 다양한 측면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문학적으로 완전한 시는 없다. 독자들에게 전해지는 순간 시들은 전혀 다른 언어로 반응하기도 한다.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읽는 이에 따라 다르게 해석하기도 하고 주관적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오독(誤讀)이 오히려 감동을 불러올 수도 있다. 독자들은 그만큼 다양하다. 난해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언어 유희에 그친 듯한 시들보다 정호승의 시가 오래 가슴에 남는 이유는 쉽고 간단하기 때문이다. 진실은 언제나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우리에게 말을 건넨다. 작고 낮은 목소리로 속삭인다. 지나치게 포장하지 않고 편안하고 가볍게 다가온다.

포옹

뼈로 만든 낚시바늘로
고기잡이하며 평화롭게 살았던
신석기 시대의 한 부부가
여수항에서 뱃길로 한 시간 남짓 떨어진 한 섬에서
서로 꼭 껴안은 채 뼈만 남은 몸으로 발굴되었다
그들 부부는 사람들이 자꾸 찾아와 사진을 찍자
푸른 하늘 아래
뼈만 남은 알몸을 드러내는 일이 너무 부끄러워
수평선 쪽으로 슬며시 모로 돌아눕기도 하고
서로 꼭 껴안은 팔에 더욱더 힘을 주곤 하였으나
사람들은 아무도 그들이 부끄러워하는 줄 알지 못하고
자꾸 사진만 찍고 돌아가고
부부가 손목에 차고 있던 조가비 장신구만 안타까워
바닷가로 달려가
파도에 몸을 적시고 돌아오곤 하였다

  두 사람이 부부이든, 연인이든 그들의 부끄러움을 헤아릴 줄 모르는 사람들에게 시인은 말한다. 사랑은 가장 내밀한 언어로 표현되는 가장 아름다운 시라고. 여전히 바다로 달려가고 싶은 수많은 연인들에게 신석기 시대의 꼭 껴안은 남녀의 모습은 시공을 초월한 감동으로 다가온다. 화석이 될만큼 사랑했던 그들의 사연이 궁금해진다. 그래서 시인은 물고기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너를 사랑한다고”

나는 물고기에게 말한다

그래도 너를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을 때
그래도 너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싶을 때
그래도 떠날 때는 내 돈을 모두 너에게 주고 싶다고 말하고 싶을 때
그래도 너에게 단 한푼도 줄 수 없다고 말하고 싶을 때
나는 촛불을 들고 강가로 나가 물고기에게 말한다
물고기는 조용히 지느러미를 흔들며 내 말을 듣고만 있을 뿐
아무에게도 아무 말도 하지 않으므로

내 산을 모두 밭으로 만들어 너에게 주고 싶다고 말하고 싶을 때
네 밭을 모두 산으로 만들어 내가 가지고 싶다고 말하고 싶을 때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이제는 인간이 되고 싶지 않을 때
기어이 인간을 버리고 혼자 울고 싶을 때
나는 강가로 나가 물고기의 허리를 껴안고 운다
침묵만이 그들의 언어이므로
침묵 외에는 그 어떠한 말도 하지 않으므로


  파란 가을 하늘만큼 아름다운 것이 있을까? 꿈이든 희망이든 좌절이든 절망이든 하늘은 늘 푸르게 감싼다. 시원스레 탁 트인 하늘을 보면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을 수 있다. 사실 하늘에게 일하지 않았으니 굶겠다거나, 사랑하지 않았으니 굶겠다는 다짐은 하지 않을 것이다. 인생에는 웃을 수밖에 없는 일이 더 많기 때문이다. 그냥 하늘 한 번 쳐다보고 웃어버릴 수 없는 일은 없다. ‘나는 언제나 한 마리 짐승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일과 사랑에 굶주린 ‘한 마리 인간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하늘에게

어제 하루 일하지 않았으므로
오늘 하루를 굶겠습니다
어제 하루를 사랑하지 않았으므로
오늘 또 하루를 굶겠습니다

굶겠습니다
오늘 하루도 일하지 않았으므로
내일 하루도 굶겠습니다
오늘 하루도 사랑하지 않았으므로
내일 하루도 굶겠습니다

인생에는 웃을 수밖에 없는 일이 더 많다고
어머니는 빙그레 웃으시지만
나는 언제나 한 마리 짐승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배고픈 한 마리 인간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포옹하고 싶은 많은 것들을 생각하며 정호승의 ‘포옹’을 들고 가을을 맞아 보는 것은 어떨까? 내게는 얼마나 포옹할 것들이 많은가? 포옹할 수 없는 것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


07092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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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9-21 14: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sceptic 2007-09-26 2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끔 들러 흔적 남기지 않고 글 읽고 갑니다. 무례를 용서하시고 님도 행복한 가을 맞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