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 질서 - 긴축이 만든 불평등의 역사
클라라 E. 마테이 지음, 임경은 옮김, 홍기훈 감수 / 21세기북스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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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여우가 말했다.

“이리 와 나하고 놀자. 난 정말로 슬프단다.” 어린 왕자가 제안했다.

“난 너하고 놀 수가 없어. 난 길들여지지 않았거든.” 여우가 말했다.

“길들인다는 게 뭐지?”

“그건 ‘관계를 맺는다’는 뜻이야.” 여우가 말했다.

“넌 아직까지 세상에 다른 수많은 아이들과 다를 게 없는 한 아이에 지나지 않아. 그래서 난 네가 필요 없어. 너도 물론 내가 필요 없겠지. 나도 세상에 흔한 여러 여우들과 다를 게 없는 한 여우에 불과하니까. 그러나 네가 나를 길들인다면 우린 서로 필요하게 될 거야. 너는 나한테 이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것이 될 테니. 나도 너한테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것이 될 거구......”

너무 자주 보면 감동도 의미도 사라진다. 어린 왕자의 여우의 대화가 그렇다. 관계를 맺는다는 건 서로 길들이는 것일까. 누가 누구를 길들이고 길들여지는 걸까. 현실에는 소혹성 B612호에 살던 어린 왕자 같은 사람이 거의 없다. 반복해서 말해도 듣지 않는 귀 없는 사람이나 상대방의 기준과 무관하게 선을 넘는 사람들은 대개 부모, 형제, 연인, 친구처럼 사랑과 우정과 친밀감을 내세운다. 그건 길들이고 길들여지는 자발성이 아니라 강요와 순응이 아닐까.

비록 사람은 아니지만 어떤 제도와 규정도 다르지 않다. 시대와 상황과 선택의 결과일 뿐 언제든 고치고 바꿀 수 있다는 생각보다 적응과 생존에 초점이 맞춰진다. 자본주의와 민주주의가 그렇고 자유와 평등이 그러하며 공정과 정의가 그러하다. 질서를 잘 지키는 사람, 법 없이도 살 사람은 피해를 보는 세상은 바람직하지 않다. 그러나 그 질서와 법은 누가 왜 만들었을까. 변하지 않는 진리가 아니라 합의된 선택이라면 비판적 관점을 유지하며 개선의 노력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 자본의 질서에 순응하는 삶이 아니라 그 질서의 모순과 문제를 들여다보는 노력이 필요하다.

클라라 E. 마테이는 ‘긴축’이라는 프리즘으로 자본주의를 톺아본다. 자본주의 체제가 공고해진 20세기 이후 경제의 흐름을 연구한 결과물로 그 깊이와 넓이가 충분하며 관점과 기분이 명확하다. 지나간 경제 상황에 대한 평가와 해석은 지극히 주관적일 수 있으나 원인을 진단하고 결과를 살피는 일은 현재와 미래를 위한 필수 코스다. 주로 유럽, 특히 영국과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1차 세계대전 이후의 상황을 살피고 있으나 정부의 개입 여부, 재정 건전성, 경제 민주화 등 신자유주의 이후 세계 경제의 방향과 목표를 고민하는 데 매우 중요한 지식과 정보를 제공한다. 저자의 고민과 연구가 자본 질서를 개선하는 데 중요한 역할과 의미를 찾을 수 있으려면 각국의 경제 상황과 정책에 대한 방향을 먼저 점검해야 한다. 대한민국의 경제는 안녕하신지, 그 목표와 지향점은 합의할 수 있는지, 정부의 정책 방향에 동의할 수 있는지, 특히 ‘긴축 재정’에 대한 철학과 현실은 조화를 이루고 있는지 다 같이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는 점에서 이 책은 충분히 의미 있는 논쟁을 촉발할 수 있다.

자본주의의 두 기둥은 ‘사유재산’과 ‘임금 관계’다. 생산 수단과 노동력이라는 거대한 축을 이해하지 못하면 일상에서 벌어지는 고민의 원인을 들여다보지 못한다. 이 책은 크게 두 부분으로 설명한다. 1부 전쟁이 만든 불평등의 역사는 1차 세계대전 후 1918~1920년 영국과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대다수 노동자, 즉 국민들의 삶을 들여다본다. 불평등이 어떻게 공고해졌는지, 전쟁 이후 새로운 질서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살펴볼 수 있다. 2부에서는 긴축의 탄생과 배신을 설명한다. 경제 전문가들의 생각과 긴축 설계도가 어떻게 현실에 적용되었는지 설명한다. 긴축의 3가지 지표인 ‘노동 분배율, 착취율, 이윤율’을 통해 긴축의 작동 방식을 들여다본다.

언제나 중요한 건 우리의 삶이다. 자본 질서는 다수의 권리를 박탈하는 경제이론이다. 왜 사람들은 반민주적이고 독재적인 경제 질서와 제도에 순응하는가. 다수는 소수의 이익에 복무하는가. 낙수 효과? 전문가의 지식과 정보? 경제 성장에 대한 신화? 그 이유가 무엇이든 ‘긴축으로 이익을 보는 자가 누구인가?’라고 묻는 저자의 서문에 답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그 답은 개별 독자의 몫은 아니지만, 문제를 인식하고 해결하려는 의지가 없으면 ‘경제의 비정치화’라는 긴축의 슬로건을 내면화하게 된다. 인류는 아주 오랫동안 “자본의 노예로부터 노동의 해방으로” 나아가기 위해 지난한 투쟁을 반복했다. 정치적 이념과 무관하게 경제 논리 앞에선 모두가 냉정해지고 이해관계를 따지는 일은 본능에 가깝다. 그러나 목소리 높여 자기 이익에 반하는 이율배반적 생각과 태도를 주장하는 놀랍기만 하다. 인터넷 게시판에, 부동산 카페에, 다양한 경제학자들의 칼럼에 반영된 기준과 목표를 통합할 수는 없다. 그러나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한 선택과 결정인지에 대해서는 ‘쿠이보노’를 살펴야하지 않을까.

계급 갈등과 경제 지배는 최상위층의 개인이 이윤 추구라는 더 큰 경제적 미덕을 발휘해 모두를 이롭게 한다는, 이른바 조화를 탈바꿈한다. 이런 식으로 경제이론은 수직적 생산관계를 비판할 여지를 허용하지 않고, 자본주의를 정당화하며, 대중에게 순응하라고 설득한다. - 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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