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은 날씨를 바꾼다
서동욱 지음 / 김영사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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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구름이 몰려오니 조심하라 인간들이여!

이렇게 그대가 말할 때,

창조하는 자들은 모두 가혹하다,

이렇게 그대가 가르칠 때,

오 차라투스트라여

그대는 날씨의 조짐에 대해 얼마나 조예가 깊은지!

_프리드리히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칼 슈미트의 『땅과 바다』는 인류사를 땅과 대양의 힘이 부딪치는 ‘투쟁’으로 요약한다. 자연을 극복하려는 인간의 노력이 곧 문명의 역사다. 생각하는 존재로서 인간은 이성과 합리성의 지배를 받지만 인식론과 존재론으로 모든 걸 설명할 순 없다. 여전히 ‘감정’ 혹은 ‘감성’의 영역에서 벗어날 수 없는 한계, 아니 특징과 개성을 전제로 선택과 판단을 가늠할 수 있으며 삶의 목적과 가치, 즉 “뭣이 중헌디?”를 결정한다.

바람이 머물 순 없다. 오늘처럼 구름 낀 하늘에도 별은 사라지지 않는다. 철학은 날씨를 바꾸는 게 아니라 오히려 날씨가 철학적 관점을 흔드는 게 아닐까. 서동욱의 에세이는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 밀란 쿤데라의 『불멸』, 황지우의 〈거룩한 식사〉, 플라톤의 『국가』, 로베르트 발저의 『산책자』, 장자크 루소의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 헤로도토스의 『역사』, 마틴 버낼의 『블랙 아테나』등 고전과 문학과 사회학의 명저가 망라한다. 풍요로운 지적 산책에 동참하면 눈과 귀가 즐겁고 시야가 트이며 생각은 깊어지고 생각은 맑아진다. 현실을 벗어난 자리에 철학이 놓이는 게 아니라 철학적 사유로 현실을 긍정 혹은 부정하려는 태도가 낯설어 보이지만 자기 삶을 향유하고 그 깊이를 더하는 건 순전히 독자의 몫이 아닌가.

달콤한 말 한마디의 위로는 적지 않으며, 공감을 이끄는 한 문장이 힘을 주기도 하지만 시시각각 변화무쌍한 현실과 매번 좌절하고 마는 연약한 결심과 ‘노오력’의 결과를 차분히 살피려면 생각의 근육이 필요하다. 닭가슴살과 계란을 챙겨 먹는 노력만큼 중요한 철학적 사유는 어떻게 채워질 수 있을까. 대개 책을 읽는 행위가 가장 무용하지만 아름답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있다. 현실을 도피하거나 망각을 위한 독서를 즐기는 사람도 나쁘지 않다. 그러나 가장 치열한 투쟁의 도구로서 책, 자기 삶의 문제 해결을 위한 독서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서동욱의 에세이는 기생충과 예술, 우울과 여행, 남녀관계, 인공지능, 근대와 주체, 염세주의, 느림과 환생, 나이듦과 죽음 등 매우 현실적이며 철학적인 주제를 고루 다룬다. 형식과 내용에 갇히지 않고 다양한 이야기가 두서없이 펼쳐지지만 각각의 주제에 천착하는 사유의 밀도는 단단하다. 끝끝내 밀어붙이지 못하고 ‘타협’하는 게 옳은 선택이 아닐 때가 많다. 언제나 경계에 서성이다 금을 밟고 후회한 적이 많다. 그 결정적 순간들, 선택의 무게와 책임 앞에서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를 찾거나 적당한 합리화 과정을 거쳐 인지 부조화를 극복한다. 그래야 살 수 있으니까. 내일을 포기할 수 없으니까.

위안의 말 대신 산책을 권한다. 걷고 움직이며 생각을 정리하고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면 죽는다. 의학적 죽음이 아니라 성장을 멈추면 존재론적 사망 선고를 받는 법이다. 아무도 손 내밀지 않아도 혼자 걸을 수 있는 힘을 길러야 한다. 현실은 잔인하고 미래는 암울하다. 누구도 알 수 없는 내일은 결국 지금, 여기 각자의 생각과 태도가 결정하는 게 아닌가. 흐린 날이다. 이런 날 황지우는 “어느 날 나는 흐린 酒店에 앉아 있을 거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온갖 고생에서 서리 같은 귀밑머리가 많아짐을 슬퍼하니,

늙고 초췌해져 이젠 흐린 술잔마저 멈추었네.

_두보, 〈등고登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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