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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zeppa ㅣ 문학과지성 시인선 597
김안(김명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4년 2월
평점 :
표제작으로 실린 「Mazeppa」는 우크라이나의 영웅, 이반 스테파노비치 마제파Ivan Stepanovich Mazeppa를 가리킨다.(류수연 해설, 「연옥으로의 한 걸음」, 108쪽) 또한 마제파Mazeppa는 리스트liszt의 초절기교 연습곡 4번이기도 하다.
나는 듣는다,
토끼가 겨울나무를 파먹는 소리,
얼어버린 눈동자가 물결처럼 갈라지는 소리.
나는 듣는다, 술로
연명하다 굶어 죽은 시인의 창밖으로 계절처럼
전진하던 기차 소리,
그 소리에 밤하늘의 불꽃이 흔들리고,
낭만과 폭력을 구분하지 못하던 시절과,
죽은 이의 입속으로 들어가는 벌레의 날갯소리,
듣는다,
음독이 묵독이 되는 소리,
기억을 잃은 이들이 거울 앞에 서는 소리,
나는 실패하고,
나는 전진하기에,
이것은 나의 몫이므로.
_ 「Mazeppa」중에서
함정에 빠진 젊은 청년 기사의 사랑 이야기와 시련과 생존을 거쳐 독립 영웅이 되는 반전 서사는 이 시집과 닮은 구석이 없다. 시인은 리스트가 제안하듯 시의 기교를 연습한 게 아니라 매 순간 처음인 모든 이의 삶에 반전을 기대하라는 위로를 보내려 한 것일까. 왼갖 잡소리를 듣고 싶지 않은 순간들, 뵈는 게 없어도 좋을 것 같은 장면들이 떠오른다. 누구나 자기 삶을 실패하며, 또 전진한다.
‘내가 젊을 적 쓰고자 했던 것들은 어떤 빈곤함의 형상, 때론 논리와 신랄한 야유, 잠자리 날개 같던 당신의 이마와 별 무리와 당신의 끝’(「시인의 말」중에서)이 먼저 튀어나와 당혹스럽다. 이제 젊지 않은 시인이 쓰고 싶은 건 뭘까? ‘말의 해방, 말의 깊이 따위를 향해 손 내밀다니 겁도 의미도 없이’ 변명과 술수로 부끄러운 연옥을 포장할 순 없다. 언어의 세계가 존재의 한계라는 사실을 자각했다고 인간이 전혀 다른 존재로 사는 건 아니다. 추악한 변명과 끝없는 변명으로 자신을 합리화할 뿐. 시인의 말은 이제 막 시작한 독자의 시 읽기를 방해한다.
그러다가 문득 ‘내 질문들은 자꾸만 어리석어지고, 어리석어지니 입을 틀어막고, 세상에는 이토록 많은 선의와 이토록 불가해한 다정함이 가득하니, 나는 그저 진부함과 유치함 속에만 존재하는 사람이 되어’(「뒤풀이」중에서) 버린 시인에게 공감하며 푸른 하늘을 잠시 쳐다본다. ‘세계의 절반은 어둠이고 그 남은 절반이 빛이라는 뻔한 술수’(「무의식」중에서)라는 사실을 몰라서 쓸쓸한 게 아니다. 사람들에게 선의와 다정함이 필요한 건 어둠 때문이 아니라 빛의 그림자 때문이 아닌가.
이념도 없고 분노도 없는 계절이 왔다. 마음이 질겨서 봄이다. 이제 나는 한 줄로도 만족하게 되었다. 한 줄만큼의 어리석음이면 족하다. 그 정도의 망신이면 족하다. 부끄러운 봄이다.
_ 「입춘」중에서
허나, 2024년의 봄은 이념과 분노로 가득하다. 마음이 모질지 못하면 견디기 힘든 시절은 저마다 다른 빛깔과 모양일 터. 사람들은 어리석음과 망신은 항상 타인의 몫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복잡하게 착하며 타인은 단순하게 나쁘다는 착각. 봄이 부끄러운 게 아니라 외면과 부인 그리고 자기 합리화의 모순을 견디는 힘이 가끔 못내 부럽다. 입춘을 지나 우수, 경칩까지 스쳐와도 갈 길은 멀고 험하다. 봄이 온다고 해서 부끄러움 없는 생활이 가능하다는 생각은 언제나 희망 고문이다.
‘설운 마음이 넘쳐서 누워만 있던 오후다. 잠든 딸아이 옆에 누워 머리를 쓰다듬다가 빗소리에 몸을 일으켜 앉으니’(「귀신의 맛」중에서) 창밖엔 켜켜이 쌓인 세월의 더께가 두툼하다. 잠든 아이의 손톱을 깎던 평화가 전생 같다. 고개 한번 돌리면 시간의 저편으로 넘어갈 수 있을까. 마음이 어린 후이니 하는 일이 다 어리다.
마음 밭에 거름을 주고 비가 와 촉촉하고 부드러운 상태가 되어야 쓸 수 있다. 읽는 일도 다르지 않다. 시인은 ‘지난가을이었다.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온종일 집에만 있었다. 할 수 있는 일이 없으니 읽을 수 있는 책도 없었다. 지난가을이었다.’(「붉은 귀」중에서)라고 고백한다. 읽고 쓰는 일이 아닌 사람들의 일상도 마찬가지다.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게 아니라 할 일을 못하는 상태, ‘지난 가을’이 아니라 굳이 ‘지난가을’이라고 말하고 싶은 때가 있다. 누구에게나 그 순간은 온다. 그러나 그 방법과 태도는 제각각이다. 지난 가을이 아니라 올가을로 만드는 사람들은 누구일까. ‘창에 비친 나를 본다. 늙고 있다, 늙은 개 같은 인간 늙은 인간 같은 개 같던 지난가을, 네발로 나는 빈다. 나는 반성합니다. 보세요, 최대한 인간처럼 걷고 있습니다. 마치 미래가 있는, 생활이 있는 사람처럼 웃으며 전활 받고, 네네, 생활이 있는 사람입니다, 나는 반성한다.’(앞의 시)
생활인의 슬픔에는 시인의 말대로 ‘자본주의의 돼지’가 된 친구를 우연히 만나는 일보다 구체적이고 현실적이다. ‘망각이 용서를 낳는다고 했던가, 그 용서가 영혼을 병들게 만든다고 했던가.’(「이 문장을 끝내지 못한 곳에서」) 어쩌면 용서하지 못하는 건 타인의 음험한 욕망이나 자본주의가 아니라 자기 자신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산다는 무언가 그립다는 말 한마디 때문이거나 모든 것을 상실했음을 확인하는 과정이다.
이것이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다. 다만 내게 필요한 것은 단 하나뿐이다. 그건 세상에 없던 새로운 비유를 만드는 일 같달까. 아버지의 구석진 장례식장에 온 사촌 동생 부부의 고귀한 옷차림 같은 거랄까. 눈앞에서만 착한 학생들처럼, 나는 한껏 슬퍼했었지. 아니 그런 것보다 더 가치 있는 일일 테다. 마음을 쏟는다는 말은 두 가지로 읽힌다. 최선을 다했거나, 더 이상 쏟을 것 없이 모든 것을 상실했거나.
_ 「마음 전부」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