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3 - 되찾은 시간 2
마르셀 프루스트 지음, 김희영 옮김 / 민음사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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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많던 ‘시간’은 도대체 어디로 사라졌을까. 지나간 시간은 아쉽고 남은 시간은 불안한 법이다. 100년 전 사람 마르셀 프루스트는 어느 날 문득 “문학 작품의 모든 소재는 내 지나간 삶”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을까.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 떠난 시간 여행에서 되찾은 건 무엇일까. 늦가을에 시작한 소설이 봄에야 끝이 났다. 13권 5,700쪽에 달하는 분량의 소설을 읽는 동안 계절이 달라졌고 해가 바뀌었다. 콩브레를 읽는 동안 검은 머리는 옹브레가 되었다. 누구나 시작하지만 아무도 끝내지 못하는 소설이라는 소문부터 세상에는 이 소설을 읽은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다는 풍문까지 떠도는 책은 과연 그러했다. 지루하고 황망한 디테일에 숨이 막혔고 한 발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수십 쪽은 기본으로 되새김질을 하는 문체에 독자들이 어떤 느낌이었을지 실감했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이르는 프랑스의 사교계와 살롱 문화가 공간과 시간을 넘어 21세기 한국인에게 ‘감동’을 주는 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어느 도서관이든 3권부터 새 책인 이유가 있는 법.

그러나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다. 그 찐득한 답답함도 익숙해진다. 그리고 기나긴 만연체가 편안해지고 묘한 매력을 품기 시작하면 프루스트의 그물에 걸려든다. 수많은 등장인물과 지루한 서사가 오히려 마음에 미세한 균열을 일으키며 읽는 사람의 추억 속으로 안내하는 듯하다. 읽은 문장을 다시 읽고 또 몇 쪽 앞으로 돌아가게 하는 힘(?)은 복잡한 사건 전개나 난해한 문장 때문이 아니라 개별 독자의 ‘추억’과 프루스트의 ‘시간’이 다르게 흐르기 때문이다. 지나간 삶을 돌아보며 어쩔 수 없이 망각할 수 없는 일들이 되살아나거나 선택적 기억이 엉켜 사건을 재구성하는 동안 우리는, 아니 나는 현재를 해석하고 미래를 예견하며 삶에 엉뚱한 의미를 부여한다. 소설을 읽는 게 아니라 자신의 삶을 읽는 독자는 ‘고르지 않은 포석의 감각과 뻣뻣한 냅킨과 마들렌의 맛’과 같은 각자의 소리와 향기와 감각에 집중한다. 과거를 소환하는 트리거는 선물이나 일기장만이 아니다. 인생을 반추하는 사람은 시간을 잃어버린 게 아니라는 걸 깨닫는다. 기억과 추억 사이에서 ‘시간’을 되찾지 못한다면 마르셀 프루스트는 왜 읽고 싶은 것일까.

「스완네 집 쪽으로」 시작한 기나기 이야기는 7편 「되찾은 시간」으로 마무리 된다. 드레퓌스 사건(1894~1906)으로 시작된 이야기는 제1차 세계대전(1914~1918)과 함께 마무리 된다. 1909년부터 1922년까지 집필된 이 소설은 주관적 기억과 사랑, 질투, 열정에서 객관적 서사와 늙음과 죽음 그리고 예술과 글쓰기에 대한 성찰로 마무리 된다. 7편까지 반복해서 등장하는 등장인물들은 이제 병들거나 늙고 죽는다. 그들을 닮은 다음 세대가 등장하기도 하지만, 동성애자이며 성도착(사드마조히즘)자인 샤를뤼스의 죽음과 전장에서 숨을 거둔 생루의 대비된 삶은 모렐이라는 연결고리를 통해 아이러니를 드러낸다. 전편을 통해 끝끝내 성과 사랑의 문제는 베일에 쌓인 듯 모호한 추정과 해석만 난무한다. 불로뉴숲 가로수길의 게르망트 살롱에서 유년시절을 추억하는 회상의 회상 장면만큼 인상적인 장면과 깊은 성찰을 담아낸 문장을 옮겨 적다가 이 소설은 결국 기나긴 프루스트의 예술론, 작가론과 20세기 초 유럽 예술계의 이론과 흐름을 톺아보는 시간이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삶과 죽음에 관한 서사가 소설의 본질이라면 프루스트는 누구보다 성실하고 꼼꼼한 작가임에 틀림없다. 게르망트 대공 부인 살롱의 후일담, 세월의 흐름 속에 늙어버린 사람들의 이야기로 7편을 마루히 하지만 결국 그것은 자기 삶에 대한 성찰이 아니겠는가.

‘스완 부부의 살롱이나 게르망트네의 살롱, 또는 이와 정반대편에 있는 베르뒤랭네의 살롱에서 보낸 사교계에서의 내 모든 삶’을 기록하는 거대한 문장들 사이에서 독자들은 길을 잃기 위해 책장을 펼치는 게 아닐까. 잃어버린 시간을 찾기 위해서가 아니라 되찾을 수 없는 시간을 위해 프루스트의 문장뒤에 숨어버리는 건 아닐까. 왜냐하면 프루스트는 “오로지 유추의 기적만이 내게 지나간 날들을,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게 해 주는 힘을 가졌고, 그 앞에서 내 기억과 지성의 노력은 언제나 좌초했다.”라고 고백하기 때문이다.

“작가는 창조하는 자가 아니라 마음속에 있는 인상을 파헤치고 규명하고, 자신의 언어로 옮기는 번역가이다.”라는 김희영의 해설은 “나는 본질적인 책, 유일하게 참된 책은 이미 우리 각자의 마음속에 존재하기 때문에 위대한 작가는 통상적인 의미에서 발명할 필요가 없으며, 다만 번역하기만 하면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작가의 임무와 역할은 바로 번역가의 그것이다.”라는 문장에 기인한다. 각자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책을 번역하는 시간을 위해, 바로 그 시간을 찾기 위해 우리는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는다.

세월은 흘러가며, 젊음은 늙음에 자리를 내주며, 가장 단단했던 재산이나 왕좌도 무너지며, 명성이 순간적이라는 걸 알아도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왜냐하면 그 모든 것을 인식하는 방식이, 말하자면 ‘시간’에 휩쓸린 그 유동적인 세계의 사진을 찍는 방식이 모순되게도 그 세계를 고정하기 때문이다. - 18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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