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놉티콘 : 제러미 벤담 책세상문고 고전의세계 64
제러미 벤담 지음, 신건수 옮김 / 책세상 / 2007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범죄가 개인을 사회로부터 소외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람들이 사회 속에서 이방인처럼 소외되어 있기 때문에 범죄가 발생한다. - 미셸 푸코, <감시와 처벌>, P. 420

  미셸 푸코의 <감시와 처벌>이 아니었다면 관심 없었을 파놉티콘을 꼼꼼하게 보고 싶었다. 마침 ‘책세상’에서 제러미 벤담의 <파놉티콘>이 나왔기에 숨가쁘게 읽었다. 이 책은 영어판이 아니라 1791년에 출간된 프랑스어 판본을 대본으로 삼아 번역했다. ‘제러미 벤담이 프랑스 국민의회 의원 가랑에게 보내는 편지’를 쓰고 친구 뒤몽이 요약해서 ‘감시 시설, 특히 감옥에 대한 새로운 원리에 관한 논문’이라는 제목으로 쓰여진 내용이다. 벤담이 프랑스에 직접가지 않고도 쉽고 정확하게 전달될 수 있도록 요약한 논문이기 때문에 복잡하고 상세한 건축 시설에 대한 내용들은 전부 생략되어 있으며 파놉티콘의 체계와 운영방식, 특징과 장점들을 잘 정리하고 있다.

  벤덤이 주장하는 공리주의와 초기 자본주의를 대표할 만한 건축 형태로서 ‘파놉티콘’을 내세운 푸코의 힘이 아니었다면 다시 주목받지 못했을 것이다. 근대 이전에 재판과 형벌을 기다리는 장소에서 감금이라는 처벌보다 재사회화의 기능을 떠맡았던 감옥은 사회적 이익을 중시한 공리주의적 성격이 잘 드러난다. 스스로를 통제함으로써 규율화된 인간을 만들려는 전략은 근대의 작동원리로서 현재까지 유효하다.

  21세기의 정보 산업화 사회에서도 이 통제 시스템은 점점 교묘해지고 있으며 역사적 관점으로 살펴볼 때 이러한 시스템의 미래는 여전히 폭력적인 수준으로 발달할 것으로 보인다. 비판적 관점은 차치하고서라도 근대의 작동원리라는 측면에서 ‘파놉티콘’은 미래 사회를 비춰보는 탐조등의 역할을 하고 있다. 조지오웰이 예견했던 사회는 현실이 되어가고 있다. 그렇지만 단순 비교하면서 부정적 관점으로만 보아서는 안된다. 개인과 인권이 중시되는 사회가 옳으냐 그렇지 않느냐의 문제는 논쟁의 범위에서 벗어나는 것은 아닐까? 어떤 사회를 지향하느냐, 어떤 삶을 추구하느냐의 문제는 사회적 합의를 넘어 개인의 선택이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감독관은 마치 유령처럼 군림한다. 이 유령은 필요할 때는 곧바로 자신이 존재한다는 증거를 드러낼 수 있다.
  이 감옥의 본질적인 장점을 한 단어로 표현하기 위해, 진행되는 모든 것을 한 눈에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하는 파놉티콘(panoptique/panopticon)이라고 부를 것이다. - P. 23


  얼마나 많은 시선과 감시 속에서 우리는 살아가고 있는지 알지도 못한다. 교통카드는 초단위로 사람들의 움직임을 파악할 수 있으며 길거리와 건물마다 설치된 감시카메라와 인공위성에서 내려다보는 세상은 거시적, 미시적 관점에서 거의 완벽하게 피할 수 없는 시선들에 둘러싸여 있다. 개인이든 국가든 서로서로 감시의 눈길을 거두기 힘들만큼 익숙해지고 있다. 유령처럼 군림하고 있는 감독관은 어디에나 존재한다.

살아 숨 쉬는 모든 공간 속에서 우리는 자유롭지 못하다.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이제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규율적 제도와 폭력적 시선들은 개인들에게 자기검열 기제로 작동한다. 스스로, 알아서 기어다닌다. 조심하고 방심하고의 문제는 중요하지 않다. 익숙한 시선들 속에서 무덤하게 지내거나 무시해 버리기도 한다. 개인정보는 이미 공유되어 있으며 사생활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마음만 먹는다면 누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아내는 것은 정말 어렵지 않은 세상이 되었다. 커다란 권력이나 힘있는 자의 특권이 아니라 조금만 관심을 기울여도 혹은 기울이지 않아도 쉽게 알려지는 수단과 방법들이 도처에 널려있다.

  벤담은 파놉티콘을 공리적 관점이나 초기 자본주의의 작동 원리로 제시했지만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위해 ‘파놉티콘’이 기능했다고 믿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누구에 의한 어떠한 제안이든 개인과 사회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합의없이 주장되고 실행되었다면 분명한 폭력이다. 그토록 갈망했던 감시체계의 감시자가 되지 못했지만 벤덤은 자신의 구상에 대해 단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으며 전 재산과 인생을 걸고 올인했다. 이후에 비슷한 형태의 감옥이 지어지고 실행되었지만 과학과 기술의 발달은 파놉티콘 체제보다 월등한 감시체계와 통제 시스템을 만들어내고 있다.

  불과 몇 백년 동안 사람들의 삶은 빠르게 변해왔으며 그 형태와 기능 면에서 비교를 불허한다. 태어나면서부터 부모가 ‘빅브라더’가 되고 학교에 입학하는 순간, 병영에 도착하는 순간, 사회에 첫 발을 내딛는 순간 우리는 모든 자유를 포기하고 벤덤이 그토록 갈망했던 일망 감시체계의 시선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책의 말미에서 그가 주장했던 것처럼 말이다. 푸코의 <감시와 처벌>을 읽기 전에 적절한 에피타이저로 이 책을 권한다.

마지막으로 이 원리는 다행스럽게도 학교나 병영, 즉 한 사람이 다수를 감독하는 일을 맡는 경우에 모두 적용할 수 있다. 파놉티콘 장치를 통해 단 한 사람에 의한 용의주도함의 이점은 다른 체계에서 사용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성실함보다 더 나은 성공을 보장한다. - P. 70


070903-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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