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들의 풍경 - 고종석의 한국어 산책
고종석 지음 / 개마고원 / 2007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말들은 저마다 자기의 풍경을 갖고 있다. 그 풍경들은 비슷해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다 다르다. 그 다름은 이중적이다. 하나의 풍경도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르고, 풍경들의 모음도 그러하다. 볼 때마다 다른 풍경들은 그것들이 움직이지 않고 붙박이로 보인다. 그러나 변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그것이야말로 말들이 갖고 있는 은총이다. 말들의 풍경이 자주 변하는 것은 그 풍경 자체에 사람들이 부여한 의미가 중첩되어 있기 때문이며, 동시에 풍경을 보는 사람의 마음이 자꾸 변화하기 때문이다. - <말들의 풍경>을 시작하며, 1989년 김현

  1990년 겨울에 나온 김현의 <말들의 풍경> 서문은 이렇게 시작된다. 1부 말들의 풍경에서 김현은 최승호, 최승자, 김정란, 김혜순, 곽재구, 박남철, 유하, 황인숙, 송찬호, 기형도의 시에 대해 말하고 있고 2부 보이는 심연과 안 보이는 역사 전망에서는 이성부, 이승훈, 김정웅, 박상륭 등의 작품을 분석하고 있다. 너무나 익숙해져버린 이름들이다. 아득한 스무살 무렵 추억의 언저리를 더듬게 한다. 여전히 건재하게 한국 현대시에 주요 시인으로 남아 있는 이들이 당시엔 재기 발랄한 신인이거나 젊음의 열정을 내뿜을 무렵이었다. 17년의 세월이 흘렀으니 충분히 감회에 젖을 만하다.

  고종석은 선배의 책 제목에 기댄 것도 아니고 똑같은 제목으로 책을 묶어 냈다. 영화용어로 ‘오마주’에 해당하는 것일까? 한국일보에 연재되었던 칼럼을 모아 <말들의 풍경>이라 이름 지었다. 법학과 언어학을 공부한 저자의 이력은 글을 읽는데 크게 도움을 주지 않는다. 최근에 <모국어의 속살>에서 보여주었던 혹은 지금까지 그가 보여주었던 우리말과 글에 대한 애정과 관심 그리고 비판적 관점들이 이 책에서도 오롯하다. 신문의 칼럼이라는 제한된 분량때문인지 깊이 있고 심층적인 내용을 담아내지는 못했지만 하나의 주제와 인상들을 찾아내 빛을 내고 담아내는 솜씨는 장인의 경지에 이르렀다. 신문에 실린 글이기 때문에 당연한 것인지도 모르지만 어려운 말이 없고 저자 나름의 뚜렷한 색깔과 고집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문장들이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고 담백하다.

  제목에 걸맞게 우리말에 대한 관심과 분석들이 정확하고 날카롭다. 일상에서 사용되는 우리말의 특징과 한계들, 그 깊이와 갈피를 짚어낸 칼럼들이 하나의 주류를 이루고, 또 하나의 흐름은 인물에 대한 탐색이다. 정운영, 김윤식, 이오덕, 전혜린, 서준식, 양주동 등 우리말과 글을 살려 쓴 사람들의 글과 생각들을 꼼꼼하게 털어내고 제자리에 놓아 본다. 조금씩 차이는 있을 수 있겠지만 나름의 고집대로 이오덕을 평하거나 김윤식을 이야기하는 방식은 공감을 할 만하다. 홍승면, 임재경이나 정운영 등 선배들에 대한 인상과 글을 통해 보여주었던 특징들도 재미있었다.

  책으로 묶어내기 전에 분류하고 편집하고 내용을 수정하는 수고를 건너뛰며 날 것 그대로 시간의 순서대로 나열하는 방식을 취한 점이 독특하다. 각 글 뒤에 연도와 날짜를 밝혀 놓음으로써 당시의 맥락과 상황들을 엮어서 생각할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다. 독자의 입장에서는 다소 불편해 보일 수도 있으나 정치적 시론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재미있는 기록의 성격을 지닌다. 그 재미라는 것이 개인이 속한 집단과 사회가 사용하는 한국어의 풍경들에 대한 소박하고 맛깔스런 밥상과 같다. 책을 묶어내는 방식이나 책에 대한 욕심을 조금 털어버린 채(수십권의 책을 냈기 때문에 욕심이 없어 그런지도 모르지만) 소탈하게 엮어낸 <말들의 풍경>은 김현의 그것에 견주어 비교하는 것은 온당치가 않다. 스스로 밝히고 있듯이 이제 작고할 당시의 김현의 나이를 넘어선 저자가 선배에게 보내는 투정과 질투가 가당치 않다고 했지만 독자가 보기엔 정겹고 즐겁기만 하다.

  김현 선생이 생전에 이촌동 자택을 찾은 제자나 지인들이 돌아갈 때 버스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고 계시더라는 이야기를 고등학교 때 문예반 동기 녀석한테 들었던 기억이 아직도 새롭다. 특별한 이야기도 아니었지만 우리는 한동안 헤어지며 버스에 대고 손을 흔드는 우스꽝스런 짓을 했었다. 그 몇 년 후에 돌아가셨다. 제대로 이해되지도 않았겠지만  선생의 책들을 읽으며 문학에 눈떴다. 감탄과 아쉬움들은 표현이 부족해 말로 다하기 어렵지만 이제 아련한 추억과 그리움의 시간으로 남아 있다.

  17년이 지난 후 고종석은 <말들의 풍경>에서 이렇게 말한다. 언어를 바꾸려는 힘과 현실을 바꾸려는 힘의 작동원리가 같지는 않겠지만 언어의 언저리에 서성이며 쑤석거리는 모습으로 남게 될 줄이야…… 한결같은 모습으로 계속될 고종석의 이야기에 여전히 귀 기울이고 있을 것이다.

현실은 언어 이전에 있는 것이어서 언어를 바꾸려는 노력이 고스란히 현실을 바꾸는 힘이 될 수는 없겠지만, 언어의 비틀림을 응시하는 일은 현실의 비틀림을 살피는 첫걸음이 될 수 있다. - P. 99


070830-105


댓글(1)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sceptic 2007-09-04 15: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글은 아니라서..즐거운 독서 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