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대왕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9
윌리엄 골딩 지음, 유종호 옮김 / 민음사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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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악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으며 인간의 도덕 체계가 근본적으로 천박하다는 사실의 새로운 발견이다.” - E. L. 엡스타인

인간과 세상을 보는 상반된 시선은 어느 시대나 갈등과 충돌을 일으켰다. 긍정과 부정, 낙관과 비관, 희망과 절망, 기대와 실망 사이에서 사람들은 서도 다른 말들로 설득한다. 철학자, 사회학자, 소설가, 정치가 등 각자의 위치에서 현재를 살피고 미래를 전망하는 관점이 다르다. 같은 직업, 같은 시기에도 성향과 기질, 경험과 생각에 따라 인간 존재에 대한 평가, 사회 구성체의 향방이 엇갈린다. 우리는 지금, 어디에 서 있을까.

인간은 언제든 ‘악’을 행할 수 있는 존재다. 생물학적 DNA나 이기적 유전자 때문인지 타고난 본성인지 알 수 없으나 지루한 성선설과 성악설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인간 ‘악’의 본성은 지울 수가 없다. 생존에 위협을 느끼는 상황이 아닐 때, 나와 무관한 일이어도 마찬가지다. 합리화할 수 없는 악행과 사건 사고가 없는 날은 단 하루도 없다. 법과 질서로 통제된 규율 사회가 악을 제거할 수는 없다. 인간 내면의 선한 아이가 숨어 있지만 그 아이들은 대체로 그 존재를 숨기거나 활동 의지가 없는 경우가 더 많다. 한 인간의 선악 갈등, 공동체 내의 선한 인간과 악한 인간이 뒤섞인 사회를 살면서 ‘인간의 도덕체계가 근본적으로 천박하다’라는 엡스타인의 말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책꽂이 한쪽 구석에 나란히 서 있는 에드워드 윌슨의 『인간 본성에 대하여』와 스티븐 제이 굴드의 『인간에 대한 오해』를 한참씩 쳐다본다. 생물학자가 바라본 ‘인간’은 데즈먼드 모리스의 말대로 ‘털 없는 원숭이’에 불과한 건 아닌지 모르겠다. 외딴 섬에 불시착한 소년들의 무리는 짐승에 가까운 본성을 드러낼 가능성이 크다. 겨우 초등학생 정도의 나이라면 합리적 이성보다 생존 본능이 앞설 가능성이 높다. 규율과 통제는 인간의 본성과 거리가 멀다. 법과 질서는 군집 생활의 효용 때문이다. 윌리엄 골딩은 이 소설을 통해 “인간 본성의 결함에서 사회 결함의 근원을 찾아내려는 것이 이 작품의 주제다.”라고 말했다. 인간은 완전하지 않다. 의도치 않은 실수를 하고, 누군가는 의도적으로 범죄를 저지른다. 평등하고 정의로운 사회는 상상에 불과하다. 인류는 한 번도 그런 공동체를 유지한 적이 없다. 그 이유가 근본적으로 인간 본성의 결함 때문이라는 윌리엄 골딩은 『파리 대왕』이라는 우화소설로 증명하려 애쓴다.

소설은 대립하는 두 소년 랠프와 잭을 통해 인간 본성의 어둠을 들여다본다. 도덕적 우화이자 정치적 우화소설로 읽으면서 개별 독자들은 무슨 생각을 할지 궁금하다. 인간과 사회의 본질에 대한 깊은 통찰이 이 소설의 미덕이라면 작가의 회의적이고 비관적인 인간관과 사회관에 대한 상찬과 비판이 엇갈릴 것이다. 그러나 그의 말대로 “가장 위대한 생각이란 가장 단순한 법이다.”(194쪽) 절망적인 공포 상황에서 인간의 본성이 드러난다. 자기 안에 숨어 있는 ‘악’이 발현되고 타인에 대한 태도가 드러난다. 사회적 가면인 페르소나가 없는 무인도의 소년들은 점점 본능에 따라 행동한다. 생존에 필요한, 약육강식의 논리대로 움직이는 인간 본성을 비난할 수는 없다. 파괴적이고 잔혹한 충동은 모든 인간의 내면에 숨은 기질일까.

도덕적 알레고리로 가득한 장편소설의 스토리는 단순하다. 점점 가열되는 폭력과 잔인한 행동에 놀랄 무렵 ‘어른’들이 섬에 도착한다. 영국 해군이 문제의 해결사로 등장하는 건 아니지만 소년들만의 세계는 끝이 나고 무인도에서 구조된다. 양계초는 인간이라면 ‘신독愼獨’에 힘써야 한다고 했다. 공적인 장소나 다른 사람과 함께 있을 때가 아니라 방안에 혼자 있을 때가 자신의 본모습이다. 신독은 혼자 있을 때야말로 삼가고 조심해야 한다는 의미다. 타인과의 관계와 시선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 말과 행동의 주인으로 살려면 극기하고 신독하여 ‘악’의 본성을 억눌러야 한다는 충고가 아닐까 싶다. 소년들의 리더로 선출된 랠프는 “잃어버린 천진성과 인간 본성의 어둠과 돼지라고 하는 진실하고 지혜롭던 친구의 추락사가 슬퍼서 마구 울었다.” 지도자의 전형을 보여주는 주인공 랠프는 소년이라고 보기 어렵다. 우화소설의 특성상 개별 인물에 대한 몰입도는 낮고 개연성이 떨어지는 묘사가 많다. 행동이 둔하고 겁이 많으며 천식을 앓는 안경 쓴 ‘돼지’, 공포의 대상인 짐승은 소년들의 내면 모습일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사이먼, 잔혹한 사형 집행인으로 친구를 고문하는 로저는 랠프나 잭 메리듀와 또 다른 모습으로 다양한 캐릭터를 잘 소화한다.

소설을 읽는 내내 한가지 거슬렸던 점은 번역문의 표현과 문장이다. 문학평론가 유종호의 번역은 가독성을 떨어뜨릴 때가 많았다. 현재 사용하지 않는 한자어, 우리말 어휘는 얼마든지 새로 번역하거나 손봐야 하지 않을까. 예를 들어, “귀쌈을 질러박았다” “납덩이 같은 감정을 치지도외하고” 같은 표현이 무인도에서 겪는 소년들의 심리와 행동 묘사에 어울리는지 의문이다. 얼마든지 편하고 쉬운 우리말로 번역이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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