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용론 한길그레이트북스 144
볼테르 지음, 송기형.임미경 옮김 / 한길사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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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 이후 벌어졌던 참혹한 살육과 잔인한 복수는 ‘아우슈비츠’로 상징되는 제노사이드의 기원이 아닐까 싶습니다. 가톨릭과 개신교 그리고 유대교는 모두 하느님을 섬깁니다. 한 부모에게서 태어난 자식들 간의 처절한 증오와 절멸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인간의 행동이라고 믿을 수 없는 끔찍한 일들이 수없이 벌어졌습니다. 야만의 시대를 지나 이성의 빛이 스며듭니다. 볼테르는 ‘이제 그만!’이라고 외칩니다. “고마 해라, 마이 묵읏다 아이가.” 영화 <친구>의 대사가 생각났습니다. 철저한 가톨릭 신자인 볼테르는 개신교를 이해할 수도 수용할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이건 아니다 싶었던 거죠. 그러나 생각이 조금 다르다고 해서, 하느님을 믿는 방법이나 성경 해석 몇 줄 때문에 폭력과 살인을 계속할 수는 없지 않느냐는 이성적 호소이자 애타는 절규입니다. “진짜 그만들 하라고!!!”

물론 볼테르의 이야기를 귀담아 듣는 사람이 얼마나 있었을까요. 한 사람의 목소리가 세상을 울리고 한 사람의 행동이 변화를 일으키는 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타인의 공감과 변화를 이끌어내는 건 설악산 흔들바위를 옮기는 일보다 어렵습니다. 지지하는 정당을 바꾸고 응원하던 프로야구 팀을 바꾸는 일보다 훨씬 힘듭니다. 그러니 그만 싸우고 이제 나만큼 너도 중요하다는 사실만큼만 인정하자. 이해할 수 없어도 서로 죽이지는 말자. 맘에 들지 않는다고 칼로 찔러서야 되겠느냐.

나는 당신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그 의견 때문에 박해를 받는다면 나는 당신의 말할 자유를 위해 끝까지 싸울 것입니다. - 볼테르

우리가 자주 인용하는 볼테르의 이 말 한마디가 똘레랑스tolérance의 본질이 아닌가 싶습니다. 민주주의의 기본질서는 획일과 강요가 아니라 다양성에 대한 존중입니다.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토론과 타협의 길을 찾아야 합니다. 1534년 마르틴 루터가 독일어로 신약을 번역 출간합니다.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 인쇄술은 불의 발견, 직립보행, 농경으로 인한 정착생활 이후 가장 강력한 혁명적 변화였습니다. 지식의 독점 시대가 종말을 고했습니다. 라틴어로 된 성경을 읽고 하느님의 말씀을 해석해주던 성직자들의 충격보다 다이렉트로 하느님의 음성을 듣게 된 사람들의 감동이 훨씬 컸습니다. 그러니 이제 누구나 자기 생각과 믿음을 갖는 시대가 열립니다. 종교적 도그마는 종파와 무관하게 한 개인을 넘어 집단적 무의식으로 자리잡습니다. 신들린 사람들의 말과 행동을 이성으로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볼테르는 지난 역사를 돌아보며 피눈물을 흘렸을 것입니다.

칼라스 사건이 기폭제가 되어 써내려간 이야기는 한숨과 울분이 뒤섞여 있고 이성과 감정이 엉켜 있습니다. 무엇보다 놀라운 건 종교를 떠나 현재 우리가 사는 대한민국의 현실이 별반 다르지 않다는 점입니다. 모임에 참석하신 분들이 들려주신 이야기들이 각자의 상황과 위치에서 어떻게 타인과 세상이 작동하고 있는지 간접적으로 설명해 줬습니다. 특히 자본주의 시스템을 무너뜨리는 경제사범이나 유아 성범죄에 대한 불관용, 편견과 불안은 인정욕구에 대한 부작용이라는 지적,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생존 수단으로서의 의도적 냉소와 본능적 구별짓기 등에 대한 이야기가 가슴 한켠을 두드렸습니다.

관용은 남의 잘못 따위를 너그럽게 받아들이거나 용서한다는 뜻입니다. 똘레랑스와는 맞지 않는 번역어입니다. 개념 자체가 다르니 새로운 한국어 단어를 만들거나 번역어를 그대로 사용해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컨실리언스consilience라는 개념을 ‘통섭’으로 설명한 최재천과 이후의 논쟁들이 대표적입니다. 잘못 사용되면 ‘용서’ 혹은 ‘너그러운 태도’ 쯤으로 해석될 수 있으나 똘레랑스는 상대방을 향한 존중입니다. 타인의 생각과 태도를 인정하지 않으면서 내가 존중받는 건 불가능합니다. 전제조건은 아니겠으나, 개무시 당하지 않으려면 어느 누구도 어떤 이유로도 무시하지 않아야 합니다. 성별, 종교, 인종, 나이, 직업, 학력, 장애, 성적지향, 출신지역에 따라 ‘차별’하는 마음과 태도가 내안에 숨어 있다면 드러나지 않도록 조심하고 티나지 않게 숨겨야 하는게 세상을 살아가는 최소한의 예의입니다. 그것이 인간에 대한 기본 도리이며 스스로를 지키는 방법입니다.

사회심리학자 고든 올포트는 “관용의 한 중요한 요인은 우리가 그리 잘 알지 못하는 어떤 능력이다. 이 능력은 때때로 공감empathy이라고 불리는데, ‘다른 사람을 파악하는 능력’, ‘사회적 지능’, ‘사회적 감수성’이라고 할 수도 있고, 풍부한 의미가 담긴 독일어 단어를 비리자면 ‘인간 이해Menschenkenntnis’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공감하지 못하면 차별과 편견이 생기고 똘레랑스와도 멀어집니다. 말하자면 사회적 감수성은 인간의 본능이 아니라 세상을 살아가기 위한 한 인간의 능력에 해당하므로 부단히 노력하고 꾸준히 학습해야 하는 태도일 것입니다.

키케로는 “Cui bono(누가 이득을 보는가)?”라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누구에게 이익이 돌아가는 지 살피라는 말입니다. 이해관계에 따른 관용과 불관용이 결정된다면 이기적 욕심과 똘레랑스를 착각하는 일일 겁니다. 모임에 참석하신 분의 지적대로 똘레랑스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박해’하지 않는 정도의 합의도 이뤄지기 어려운 실정입니다. 일상생활은 물론 정치, 사회 곳곳에서 벌어지는 불관용의 정신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지 사람들이 인식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유튜브 알고리즘에 길들여져 점점 좁고 깊은 자기만의 프레임 속에 갇혀 살게 됩니다.

19세기 말에도 볼테르처럼 용감하게 ‘나는 고발한다’라고 외친 에밀졸라는 드레퓌스 사건을 다시 한번 세계사의 중심으로 끌여들입니다. 프랑스의 지적 전통과 지식인들의 단호한 목소리가 부러울 따름입니다. 홍세화의 『나는 파리의 텍시 운전사』(1995)가 출간된지 30년이 다 되어 갑니다. 당시 똘레랑스에 대한 관심만큼 우리의 생각, 말과 행동은 조금 나아졌을까요. 우리 사회는 나와 다른 타인의 생각과 태도를 ‘인정’하고 대화하며 타협하는 문화를 갖게 됐을까요. 기득권의 카르텔에 침묵하며 사회 곳곳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눈감고, 주변 사람들과 내 일상에 변화를 가져오지 못한다면 우리가 사는 내일은 또 어떤 모습일까요. 일요일 밤 늦은 시간까지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이런저런 생각에 늦도록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오늘 아침 모두들 각자의 삶 속으로 또 치열하게 달리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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