굳건한 믿음과 단단한 신념의 반대편에 끊임없는 질문과 합리적 의심이 앉아있다. 시소게임을 하듯 시대정신과 맥락에 따라 어느 한쪽으로 무게 중심이 기운다. 이는 단순히 근대 이후 과학의 발달에 따른 자연스런 결과라고 오해하기 쉽다. 중세 신분질서의 붕괴와 이성의 빛을 따라 걷는 개인의 탄생이 인류 문명의 변곡점이라는 사실은 틀림없다. 하지만 그 이전에도 몇몇 사람은 호모 두비탄스homo dubitans, 즉 의심하는 인간으로 살았다.
우리가 다른 동물과 달리 자연을 극복, 지배하게 된 계기는 호기심과 상상력 덕분이다. ‘why not?’이 주는 창조적 혁신이 문명 발달의 초석이 됐다. 여전히 사는 대로 생각하는 사람들 건너편에는 생각한 대로 사는 소수가 앉아 있다. 누가 맞고 틀렸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선택과 태도의 문제다. 어떻게 살 것인지에 고민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다만 그 고민의 이유와 방법, 결론에 도달하는 과정은 조금씩 다르다. 근대 이전에는 대부분 사람들이 이런 고민을 할 이유가 없었다. 태어나는 순간 직업이 결정됐고 삶의 길은 정해져 있으니 오히려 불안과 고독이 아닌 안정과 행복을 누렸을지 누가 알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몇 철학자들은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하기 위해 의심을 멈추지 않고 깊이 생각하며 프레임을 리프레임하기 위해 노력했다. 알은 하나의 세계다. 그 알을 깨고 나오는 고통의 쾌락을 모든 사람이 원하는 건 아니다.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종교와 과학의 대립과 갈등은 서로 영역 다툼을 멈춘지 오래지만 접경지역에선 여전히 날선 논쟁이 그치지 않는다. 확고한 진리를 찾아 헤맨 인간의 갈급한 욕망도 여전히 계속되지만 아무도 그것에 대해 함부로 말할 수 없다는 사실만 확인하는 중이다. 니체는 그조차도 ‘사실fact은 없다. 다만, 해석이 있을 뿐.’이라며 인정하지 않는다. 평생 공부하고 생각한 결론이 겨우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 하나만은 알고 있다고 한 소크라테스의 ‘무지無知의 지知’는 여전히 유효할까.
박규철은 확증편향의 시대에 필요한 인간형으로 『의심하는 인간』을 제시한다. 이 책은 마치 거대한 ‘의심의 계보학’처럼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으로 시작된 아카데미 학파의 회의주의와 피론학파 그리고 중세의 아쿠스티누스와 근대의 몽테뉴에 이르는 의심 철학을 역사를 샅샅히 뒤적인다. 회의주의자들은 현실에 적응하기 어렵고 사람들에게 환영받기 힘들다. 어느 조직의 리더로도 적합하지 않다. 회의주의자의 건너편에는 독단주의자가 앉아 있다. 인간은 합리적인 존재가 아니라 합리화하는 존재다. 상황에 따라 회의주의와 독단주의를 오가며 제 잇속만 챙기는 이기주의자는 이 책에서 다루지 않는다.
논의의 중심은 아카데미 학파와 피론 학파의 회의주의다. 아카데미 학파의 아르케실라오스, 카르네아데스와 피론 학파의 아네시데모스, 섹스투스 엠피리쿠스의 논리 싸움은 흥미진진하다. 두 학파의 차이를 확인하기 위해 이 책을 읽을 이유는 없다. 일반 독자라면 21세기에 소환된 고대 회의주의가 근대적 인간에게 미친 영향과 21세기에 다시 소환된 이유를 고민하는 정도면 충분해 보인다. 몽테뉴 이후 데카르트와 스피노자 ‘회의주의적 방법론’, 존 로크의 라이프니츠의 계몽주의, 프리드리히 니체의 《안티 크리스트》에 영향을 미친 회의주의는 삐뚫어진 시선, 부정적 관점과 거리가 멀다. 아이러니하게도 회의주의자로서 피론이 가장 강조했던 개념은 ‘마음의 평안’이었다. 아타락시아ataraxia를 위해서는 한 순간도 멈추지 않고 의심하고 질문하는 태도가 필요하지 않을까.
진실에 대한 탐구는 그 전까지 ‘진실’이라고 믿던
모든 것에 대한 의심으로부터 시작된다. - 프리드리히 니체, 36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