컬러의 방 - 내가 사랑하는 그 색의 비밀 컬러 시리즈
폴 심프슨 지음, 박설영 옮김 / 윌북 / 2022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를 읽었을 때 까마득한 나이였지만 얼른 서른 일곱이 되고 싶었다. 혼란과 방황에서 벗어난 진짜 어른이지만 세상에 찌들지 않은 냉소적 태도로 당당하게 홀로 설 수 있는 가장 완벽한 나이처럼 보였다. 무라카미 류의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 책장을 넘기면서 내용과 상관없이 바다와 하늘을 섞어 놓은 색이라고 상상했다. 투명하게 맑은 민트를 떠올렸을까. 그렇게 회색으로 가득한 10대를 지나 초록과 파랑 같은 20대가 떠올랐다. 폴 심프슨의 『컬러의 방』은 지난 삶을 돌아보게 하는 기이한 미술책이다. 색의 연대기 같은, 빛의 역사를 기억하는 책은 어떻게 쓰게 된 걸까.

‘색은 영혼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색은 건반이고, 눈은 해머이며, 영혼은 수많은 현을 가진 피아노’라는 바실리 칸딘스키의 말에서 색의 자리에 그림 혹은 그, 그녀라는 단어를 놓아 보았다. 보는 것이 믿는 것이라는 신념은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라는 자각의 순간을 위해 예비 된 절망의 다른 이름이 아닐까. 귀와 눈이 예민한 만큼 코와 입이 둔한 나는 가끔 흑백으로 세상을 본다는 개의 눈을 부러워한다. 미혹함이 없이 명암의 이분법적 세계가 오히려 분명하고 정확한 판단에 도움이 될 듯하다. 예민한 감각은 지나치게 많은 정보를 흡수하고 영혼을 쉽게 지치게 한다. 백색 소음 너머에 떠도는 말의 뉘앙스와 태도가 보이고 보이는 것 너머에 현상과 분리된 본질이 드러나는 순간은 생각보다 참담하다.

‘빨강의 방’으로 시작해서 노랑, 파랑, 주황, 보라, 초록, 분홍, 갈색, 검정, 회색, 하양 등 이 책에는 모두 11개의 방을 소개한다. 어느 방이 마음에 드는지 어느 방을 싫어하는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각각의 방에 잠시 머물러 그 방의 색이 내는 소리를 들어보자. 소리가 보이고 색이 들리는 경험은 비현실이 아니라 초현실적 체험이다. 저자는 세상에 존재하는 색의 역사와 의미를 단편적으로 소개한다. 거대한 벽에 다양한 에피소드와 사물들의 꼴라주. 저자는 형형색색 어지럽게 전시된 세상을 색으로 분류한다. 과거와 현재, 사람과 사물, 이미지와 상징, 상상과 현실을 뒤섞어 놓는다. 단편적인 이야기가 나열되지만 파편화된 조각이 아니라 같은 색을 향한 나름의 질서를 갖고 있다.

자연과 사물을 인식하는 방법은 학습된 개념과 언어를 도구 삼아 구별된 방에 정리된 장난감처럼 뒤죽박죽인 경우가 많다. 매우 기능적이고 효율적인 방법으로 외부 세계를 감각하고 인지 영역을 확장하는 사람도 있으나, 흘러가는 물처럼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사람도 많다. 관심과 재능에 따라 달라지는 개인의 취향 혹은 타고난 감각과 재능의 차이다. 절대음감이나 미각처럼 절대 시각이 있다면 색의 채도와 명도를 구별하는 능력이 아니라 각각의 색이 드러내는 아름다움과 비명을 구별하는 타고난 능력이 아닐까.

폴 심프슨은 사람들이 각자 좋아하는 색의 비밀을 가르쳐주려는 의도보다 사회적, 개인적 상징으로 기능하는 색의 역할과 의미를 나열하는 데 재미를 붙인 듯 수많은 이야기를 쏟아낸다. 역사, 종교, 스포츠, 비즈니스에 이르기까지 각각의 ‘색’과 연관된 스토리가 끊임없이 이어진다. 그래서 무슨 색을 좋아하시나요? 아니, 그래서 왜 그 색이어야 하며, 그 색은 왜 그런 의미를 갖게 되었는지 찾아 헤맨다.

이 책은 고흐, 모네부터 나폴레옹, 비틀스까지 수많은 사람이 등장한다. 지난 시대의 추억은 오늘을 사는 나, 혹은 우리의 삶을 위해 전제 조건이다. 영상과 사진의 시대다. 개인이 브랜드가 되고 차별화되지 않으면 견디지 못하는 현대사회에서 색에 얽힌 이야기들은 인간의 심리와 욕망뿐 아니라 대중문화와 놀이 문화를 이해하는 데 필요한 지식과 정보에 해당한다. 어느 분야든 그러하듯 타고난 재능과 감각에 지식과 노력을 더하면 빛을 발한다. 눈부시지 않아도 자기만의 방, 내가 좋아하는 색으로 가득한 방 하는 필요하지 않을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