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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에 공감한다는 착각
이길보라 저자 / 창비 / 2023년 2월
평점 :
고통은 함께 나눌 수 없다. 다만, 공감을 통해 추론할 수 있을 뿐이다. 수잔 손택은 『타인의 고통』에서 “우리는 보통 타인의 기쁨과 아픔을 공감할 수는 있다고 믿지만 그 말은 진실이 아니다. 타인의 고통을 내 방식대로 재해석하거나 유추해서 이해할 뿐, 그 사람이 느끼는 고통의 정도를 측정하거나 공유할 수는 없다. 비극은 여기에서 시작된다.”라고 냉정하게 말한 적이 있다. 아픈 자식을 바라보는 부모, 임종을 앞둔 부모 곁의 자식, 시한부 인생을 통고받은 연인은 바로 우리 자신이자 이웃이다. 그 고통은 본능적이고 감각적으로 전달되고, 때때로 육체적 고통을 동반한 슬픔으로 전해지기도 한다. 그러나 대신 아프거나 죽을 수는 없다. 모든 생의 감각은 오롯이 각자의 몫이다. 그래서 인간은 외롭고, 인생은 쓸쓸하다.
안산 동산고 재학 중 혼자 여행을 떠난 이길보라는 ‘로드 스쿨러’가 되어 돌아온다. 농인聾人(청각 장애인을 병리적으로 대하는 차별적 시선과 편견을 거부하고 수화언어를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사람들을 일컫는다. 음성언어를 중심으로 의사소통하는 사람을 청인이라 부른다.) 부모를 둔 공부잘하는 모범생, 일찍 철이 든 맏딸에게 무슨 일이 있었을까. 성장 과정, 다큐멘터리에 대한 관심과 애정, 글을 쓰는 작가로서의 삶을 담담하게 풀어낸 글들이 읽는 사람의 마음과 생각을 흔들어 놓는다. 차별은 본능일까. 나와 다른 종에 대한 경계가 생존확률을 높인 적자생존의 DNA라는 진화생물학적 설명이 편견에 대한 면죄부가 될 수는 없다. 허나, 머리로는 안 되는 줄 알면서 가슴이 시키는 대로 사는 게 일반적인 태도다. 문명사회를 이뤄 ‘자유’와 ‘평등’의 가치를 내세우며 민주국가에서 사는 개인에게 인권 감수성은 선택이 아니라 의무다. 나의 권리만큼 너의 권리도 소중하다는 당연한 인식이 부족한 공동체는 적자생존의 원리가 작동하는 정글과 크게 다르지 않다. 부와 권력에 따라 의무가 다를 수 없고 헌법정신을 자의적으로 해석해서도 안 된다는 생각이 상식이다. 대통령부터 비정규직 알바생까지 개인의 권리와 의무, 시민의 책무는 동등하다. 그 말과 행동의 무게가 다르다고 해서 특권과 특혜가 주어지는 사회는 미래가 없다. 장애인과 노조에 가입한 사람들은 불가촉천민이 아니다. 가족이고 이웃이며 나 자신이다. 그들 모두가 국민이다. 이기적 행동과 불법 행위가 될 수는 없으나 문명국가에서 시민에게 주어진 기본적인 권리를 제한하거나 헌법에 위배되는 법률과 시행령으로 통제하려는 생각 자체가 대단히 위험하다. 피아 전환의 순간, 책임질 수 없는 말과 행동으로 분노와 박수가 교차하는 태도는 자신의 생각이 옳다는 ‘착각’에 불과하다.
이 책의 제목처럼 고통에 공감한다는 착각은 ‘선량한 차별주의자’의 다른 버전으로 읽힌다. ‘오빠가 허락한 페미니즘’처럼 대통령이나 야당 대표의 편을 들며 핏대를 세우는 사람들의 생각은 과연 어디에서 출발한 것일까. ‘all or nothing’을 외치는 극한 대립과 갈등은 결국 나만 옳고 너는 틀렸다는 오만이다. 이길보라는 자신의 부모를 통해 세상을 배웠다. 아니 자신의 삶을 통해 타인의 생각과 태도를 읽는다. 그리고 우리가 사는 공동체를 들여다본다. 감정이 앞서거나 논리가 부족한 생각이 허물이 될 수 없어 보인다. 왜냐하면 이 책은 농인 자녀로 태어나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30대 여성의 관점으로 쓰였기 때문이다. 모든 글은 한계가 있다. 그 한계의 다른 말은 글쓴이의 개성이자 고유하고 빛나는 글의 특징이다. 특수한 경험을 일반화시켜 타인의 공감을 이끌어내는 이길보라의 글에는 울림이 있다. 비록 그 생각과 감정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글을 쓰는 태도와 방법은 눈여겨볼 만하다.
또 하나 우리가 살펴야 하는 지점은 이길보라의 끊임없는 도전과 용기다. 한 곳에 머물러 있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려는 노력, 자기 성장을 위해 보다 넓은 안목을 키우려는 태도가 우리를 한뼘 성장시킨다. ‘why not?’ 질문하지 않고 의심이 없는 생활처럼 무기력한 삶은 없다. 고인물은 썩는다. 자기 생각과 감정의 한계를 살피고 이것이 진짜 ‘공감’인지 ‘착각’인지 다시 한번 돌아보는 과정 자체가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이 가져야 할 태도가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