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이라는 감정은 인간의 존재 조건일까. 사랑에 관한 숱한 이야기와 노래와 드라마, 영화, 그림들을 떠올려 보면 사람들은 사랑을 위해 살고 사랑 때문에 죽는 게 아닌가 싶어진다. 기쁨과 슬픔 혹은 우울, 분노, 고독, 수치, 만족, 환희, 행복 등 설명하기 어렵고 경계가 모호한 감정의 편린들은 모두 사랑에 기인한 파생상품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성의 강 건너편에 감정이 놓인 듯 변연계와 신피질의 기능과 역할은 분명히 구별되어 있는 듯하다. 그러나 레너드 믈로디노프는 감정과 이성이 서로 구분되어 서로 다른 방에 거주하는 이웃이 아닐 수도 있다고 말한다. 은행나무처럼 이성과 감정도 한데 깃들어 있다는 주장은 흥미롭다.
감정의 목적보다 흥미로운 몸과 마음의 관계가 최근 뇌과학의 관심사를 보여준다. 감정은 어떻게 진화했는지, 핵심 정서가 무엇인지 살피는 동안 인간은 도대체 무얼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살피게 된다. 리처드 도킨스나 에드워드 윌슨 같은 과학자의 관점은 어떤 철학적 질문보다 ‘나’ 혹은 ‘우리’의 생각과 감정을 분명하게 설명해주기도 한다. 하지만 생각과 감정이 어떻게 서로 영향을 주고 받는지, 원하기와 좋아하기가 차이가 무엇인지 살피는 동안 과거로부터 그리 멀리 오지 못한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스마트폰이 바꿔놓은 인류의 뇌 구조, 아니 그것이 인간의 진화에 미친 영향은 머나먼 미래에야 밝혀질 수 있는 영역이겠으나 우리가 실감하는 극적인 변화는 생각과 감정의 변화보다 흥미롭다.
과학기술의 발달로 인해 도구를 사용하는 인간, 호모 파베르는 감정과 이성을 하나로 통합하는 과정을 온몸으로 보여준다. 수학자이자 근대 철학의 아버지라 일컫는 데카르트조차도 인간의 물질적 몸과 비물질적이고 파괴할 수 없는 영혼으로 이루어졌다는 이원론을 주장했다. 과연 그런가? 이 질문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영원한 사랑, 종교적 믿음, 천국과 내세, 공덕과 업보 등 형이상학적 세계와 인간의 죽음에 대한 공포가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된다. 인간은 도대체 어떤 존재일까.
모든 것이 마음에 달려 있다는 주장은 고대 철학부터 뉴에이지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내면, 즉 감정에 역할과 중요성을 새삼스럽게 한다. 근대 계몽주의 이후 이성과 감정의 위계질서가 분명해지듯 싶지만 일상을 사는 우리를 지배하는 건 여전히 이성이 아니라 감정이다. 전가의 보도로 휘두르는 ‘내 맘이야’라는 말속에 숨은 진의는 발화자조차 알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자기 마음의 원인과 변화를 통제할 수 있거나 예측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가능하지 않은 일인 줄 알면서 ‘해석’하려는 시도는 헛되고 헛되다. 다만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감정을 배제하거나 느낌, 추측, 판단을 줄이려는 노력은 필요하다.
저자는 우리가 느끼는 감정의 원인을 밝히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감정을 배제한 선택과 판단이 가능한가? 좌절과 분노, 쾌락과 행복은 어떻게 이해할까? 뇌과학이 밝혀낸 이론과 설명이 ‘나’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면 시간을 내 읽어볼 만하지 않을까?
대체로 한 권의 책은 분명한 목적을 향해 독자들을 끌어간다. 새로운 지식과 정보를 동원하고 저자의 생각을 보태 주장하고 설명한다. 독자를 설득하기 위해 다양하게 시도되는 방법이 효과를 거둘 수도 실패할 수도 있다. 그렇게 지난한 과정을 거쳐 한 권의 책은, 저자와 독자는 서로 타협하거나 어느 한쪽이 굴복, 좌절하거나 공감하고 연대한다. 냉소와 분노를 자아내는 책도 있고 감동과 흥분을 유발하는 책도 있다. 책을 읽은 후에 그 다양한 감정도 결국 저자의 글이 독자의 뇌를 자극하는 방법과 테크닉에 달려 있다. 좋은 책은 일시적으로 흥분을 유도하는 대신 단 한 문장 혹은 한가지 생각의 화두를 던진다. 오래 여운이 남아 두고두고 생각하게 하는 책, 설명하기 어려운 감동을 주는 책, 다른 책으로 독자를 이끄는 책이야말로 우리가 읽고 싶은 글이 아닌가.
시간이 해결해주는 많은 일과 달리, 그 자리
에 머물러 박제되는 생각과 감정도 있는 법이다. 감정의 뇌과학을 읽는 독자들은 결국 최근의 연구 동향이나 새롭게 밝히진 인간 뇌의 신비가 아니라 ‘나’ 자신을 읽게 된다. 모든 독서가 자기 이해의 출발이듯, 타인과 세상을 읽는 일과의 선후 관계가 어찌 됐든 결국에 자신을 돌아보는 행위가 이성과 감정에 대한 우리의 태도여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