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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을 말할 시간 ㅣ 창비만화도서관 5
구정인 지음 / 창비 / 2020년 12월
평점 :
그냥 만화라고 하기엔 조금 애매한 장편 단행본을 그래픽 노블이라 부른다. 내용과 형식이 어떻든 명명법은 그 실체를 규정한다. 뭐라고 부르는지에 따라 대상은 다르게 인식된다. 수준 낮은 심심풀이용 만화가 예술의 한 자리를 차지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아트 슈피겔만의 『쥐』, 안토니오 알타리바의 『어느 아나키스트의 고백』처럼 시대의 고통과 아픔을 색다른 형식으로 조망하는 만화는 순수 문학과 또 다른 방식으로 우리에게 말을 건넨다. 구정인의 『비밀을 말할 시간』을 읽은 후에 《종이의 집》에서 열연한 배우 이치아르 이투뇨를 따라《인터머시》를 보게 됐다. 그 유명한 트롤리 딜레마를 연상시킨 드라마 《트롤리》를 클릭한 건 연이은 우연일까.
우리 국민 대다수는 노동자다. 노동절을 여전히 근로자의 날로 불러야 하는 사람들이나, 자신이 노동자라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하거나 거부하는 사람들에게 노조는 어떤 의미일까. 사회적 계층 이익에 부합하지 못하는 투표 행위만큼 아이러니한 극소수 부자와 기득권을 위한 발언에 호응하는 국민(?)을 등에 업고 정치인들은 여전히 리벤지 포르노보다 천박한 빈곤 포르노를 시전한다. 유아 성폭력, 리벤지 포르노를 넘어 차별과 혐오를 부추기는 자극적 기사와 언론의 태도가 뒤섞여 현실에서 정의와 공정은 발 디딜 곳이 없다. 부화뇌동하는 포퓰리즘은 비판과 성찰을 망각한 지 오래다. 근본적인 문제 해결과 합리적인 태도를 기대하는 건 무리뉴.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끊임없이 문제를 제기하고 성찰을 촉구한다. 느리게 변해도 세상이 조금씩 나은 곳으로 변할 수 있다는 희망의 끈을 놓을 수는 없다. 구정인은 비밀을 말할 시간은 바로 지금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비밀이 비밀이 아닌 세상이 될 수 있을까. 피해자다움을 요구하거나 2차 가해가 반복되는 현실은 정치적 이념과 개인의 이해관계 때문일까. 세월호, 이태원 참사는 정치와 무관한 사고다. 아무도 의도하지 않았지만 기어이 일어나고야 마는 일, 우리는 그것을 사고라고 부른다. 다만, 의도하지 않았어도 사고를 방지할 책무, 최선을 다해 그 사고를 막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사실에 동의하지 않을 사람은 없다. 무한 책임을 져야 하는 사람들이 아랫것들에게 책임을 묻는 태도가 당당하다. 정치라는 프레임으로 세상을 덧씌우는 사람들이 원하는 건 무엇일까.
공동체의 편견과 차별이 만들어낸 혐오의 피해는 언제나 가장 빈곤하고 소외된 사람들의 몫이다. 『올해의 미숙』으로 깊은 인상을 남긴 정원의 『뒤늦은 답장』도 넓은 의미에서 같은 주제를 다루고 있다. 단순히 동성애를 다룬 만화로 분류하기 어렵다. 곳곳에서 십자가를 흔들며 고막이 터질 듯 확성기로 소음 폭력을 가하는 ‘예수천국 불신지옥’ 만큼 동성애 반대 구호와 현수막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로, 이 표현에서 ‘여성’의 자리에 대체될 말은 끝이 없다. 단지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단지 청소년이라는 이유로, 단지 노인이라는 이유로, 단지 성소수자라는 이유로, 단지 어린아이라는 이유로...
매일매일 우리가 직면하는 현실은 가히 블록버스터급 거침없는 혐오 발언과 권력 남용, 기득권 보호, 부자 감세, 노조 파괴 등등 헤아릴 수없이 많은 불공정과 불평등과 비민주로 가득하다. 그래픽 노블은 이렇게 참혹한 현실을 생생한 그림과 침묵의 시간을 통해 ‘보여준다.’ 말하지 않아도 인물의 표정과 행동을 통해 정서를 전달하는 수단으로서 만화는 미디어 시대에 부합하는 매체다. 텍스트의 종언을 논해야 할 만큼 읽지 않는 시대다. 보다 다양한 주제와 깊은 성찰을 통해 우리에게 필요하면서도 의미 있는 작업들이 계속되길 빈다. 지연된 정의는 정의가 아닌 것처럼, 비밀을 말할 시간을 놓치거나 답장이 늦어지면 비극과 고통만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