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비실록 - 숨겨진 절반의 역사
신명호 지음 / 역사의아침(위즈덤하우스) / 2007년 5월
평점 :
품절


  우리 아니, 나는 얼마나 지독하게 편협한 시선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 왔는지 확인했다. 사물 혹은 사건들 속에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정교하고 치밀한 씨줄과 날줄들이 얽혀 있다. 눈에 보이지도 귀에 들리지도 않는 그 관계를 파악하는 것은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 대상을 바라보는 방향과 눈높이에 따라 달라지기도 하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세계관이나 가치관에 따라 달라지기도 한다. 그렇다면 객관적인 기준과 판단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모든 시선들이 주관적이며 하나의 기준과 판단일 뿐이라는 말이 성립된다. 이것은 양시론 혹은 양비론이다. 모두가 그럴 수 있고 전부 다 틀릴 수 있다는 생각이다. 좋은 변명이고 성급하게 일반화할 수 있는 오류이긴 하지만 설득력 있게 대안을 제시하지는 못한다.

  책을 읽고 몰랐던 사실을 확인하고 앎의 범위를 넓히고 인식의 지평을 확대하는 즐거움은 단순히 누군가를 가르치기 위한 도구이기 이전에 인간적 삶의 가장 원초적인 욕망이며 즐거움이다. 적어도 내겐 그렇다. 그런 면에서 신명호의 <조선왕비실록>은 내게 말할 수 없는 즐거움을 안겨준 책이다. 역사는 기록에 의해서만 후대에 전달된다. 과학기술이 발달하기 이전의 역사는 오로지 활자에 의해 책의 형태로만 존재한다. 물론 건축이나 미술품 유물과 유적을 통해 당시의 삶과 문화를 확인할 수도 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과거는 오로지 기록된 문자로만 전달된다. 그런 면에서 우리가 아니, 내가 얼마나 맹목적인 시선으로 역사를 이해하고 받아들였는지 반성하게 된다.

  역사에 등장하는 인물이나 사건을 어떤 관점과 시선으로 바라보느냐의 문제는 역사에 대한 접근 방식을 결정짓는 중요한 기준이 된다. 이것을 사관이라고 하는데 단순하게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이라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중요하다. 당시의 시대 상황이나 관련된 문제들을 해석하고 판단하는 근본적인 토대가 되기 때문이기도 하며 현재적 관점에서 적용하고 이해하는 척도가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동일한 인물과 사건에 대한 서로 다른 해석은 역사가의 고유 권한일 수는 없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객관적인 자료에 의해 판단될 수 있는 것이며 정확하고 타당한 인과관계와 논리적 사유를 통해 가능한 일이다.

  이 책은 우선 목적과 방법 면에서 높은 점수를 받을 수 있다. 역사의 기록 자체가 왕이 중심이 되어 국가 단위의 사건과 흐름들을 위주로 되어 있다는 한계를 지니고 있지만 그 이외의 것들에 대한 관심은 아직도 미미하다. <한국생활사박물관>가 주목받고 높은 평가를 받는 것도 마찬가지 맥락이다. 선조들의 일상들이 어떠했는지 우리처럼 대다수 평범한 사람들의 삶은 어떠했는지가 서술의 초점이 되기 때문에 훨씬 더 흥미있고 적극적인 관심을 가지게 된다. 그들은 소외된 이웃이 아니라 역사의 주체이며 국가의 주인이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의 주체는 항상 왕과 양반들이었으며 권력을 쟁취한 자들의 잔치였다.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역사의 주제는 여성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는 어쩌면 이 책의 부제처럼 ‘절반의 역사’이다. 기록되지 않은 ‘숨겨진’ 절반의 역사는 누구에 의한 것인가? 당연히 그것은 여성들의 몫이다. 근대 이전에 여성에 대한 문제는 다른 책을 통해 충분히 확인할 수 있으며 본격적으로 여성이 주체적인 삶을 영위한 것은 불과 100년도 안된다. 지금도 물론 아시아와 아프리카 등 지구 위의 절반이 넘는 여성들은 인권의 사각 지대에 놓여 있다. 21세기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도 해결되지 않는 문제를 조선시대에 비추어 판단하거나 비난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겠지만 역사에 등장하는 여성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져 본 적이 없다는 사실에 스스로 놀랐다.

  신사임당이나 유관순이 아니라 권력의 핵심에 놓여있던 조선의 왕비들은 과연 어떤 사람들이었으며 어떻게 살았을까? 이렇게 지극히 당연하고도 자연스러운 호기심에서 출발한 책이 바로 <조선왕조실록>이다. 태조를 왕위에 오르게 한 신덕왕후 강씨, 태종 이방원의 아내였던 원경왕후 민씨, 어린 조카를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세조의 아내 정희왕후 윤씨, 성종의 어머니이자 광해군의 할머니였던 인수대비 한씨, 선조의 왕비였던 인목왕후 김씨, 뒤주에 갇혀 죽은 사도세자의 아내 혜경궁 홍씨, 너무나 유명한 고종의 아내 명성황후 민씨. 이렇게 일곱명의 파란 만장한 인생사가 이 한 권의 책을 통해 그려진다.

  출생에서부터 죽음에 이르는 과정까지 어떤 드라마나 영화보다도 극적이었던 대표적인 왕비들을 선발했다. 왕비가 되기 전 태어나는 과정과 왕비로 간택되거나 왕실의 며느리가 되는 과정 그리고 왕비가 되는 과정은 백성들의 입장에서 보면 머나먼 이야기로 읽힌다. 대표선수로 발탁된 일곱 명의 왕비는 그 어느 왕비보다도 사연 많은 여인들이다. 한 나라의 왕비로 한 남자의 아내로 무엇보다도 정치권력의 중심에 서 있던 그녀들의 삶은 눈물과 한숨으로 점철되어 있다. 저자는 단순한 역사적 자료를 제시하는 데 그치지 않고 다양한 문헌과 사료를 통해 생략되거나 보이지 않는 부분들을 유추한다. 결국 이 부분들은 역사가의 해석과 판단에 맡겨질 수밖에 없다.

  이 책은 바로 이 부분에 주목하고 있다. 조선왕조에서 벌어졌던 절체절명의 순간에 왕조의 운명을 뒤바꿀 만한 역할을 했던 왕비들에 주목하고 있는 것이다. 그녀들은 비로소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역사의 중심에 선다. 남성들보다 더욱 치밀하고 냉정한 판단력을 보여주며 남편과 아들과 손자의 운명을 뒤바꾼 여인들의 열정과 눈물들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사실에 근거한 판단과 해석, 질문과 상상들 사이에서 즐겁게 시간 여행을 한 느낌이다. 일방적이고 직설적인 설명이 아니라 독자에게 끊임없이 의문을 제기하고 실록이나 관련 서적을 인용하면서 차근차근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저자의 솜씨도 믿을 만했다. 깊은 여름밤 혹은 낯선 휴가지에서 이 책과 함께 과거의 역사 속으로 잠시 떠나보는 것은 어떨까?


070722-0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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