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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쿠호오 이야기 - 규슈 지쿠호오 탄광을 중심으로 한 격동의 민중사, 평화교육시리즈 03
오오노 세츠코 지음, 김병진 옮김 / 커뮤니티 / 2007년 5월
평점 :
절판
책은 우리에게 많은 말을 건넨다. 헤어진 인연을 떠올리게 하기도 하고, 몰랐던 지식을 전해주기도 하며, 잊고 있던 과거를 돌아보게 하기도 한다. 책을 통해 끊임없이 대화를 나누며 사색에 잠기고 나를 돌아본다. 나는 누구인가에 대해 생각하고 내가 살고 있는 이 사회는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그 과정은 어떠했는지 들여다보기도 한다. 그 과정과 진행 방식들이 우리의 과거이며 현재고 미래의 모습이다. 한 권씩 책을 읽어나가면서 책을 통해 인류가 걸어왔던 길을 돌아보고 나의 삶과 우리의 현재를 조망한다. 직접적인 행동과 실천의 문제가 늘 숙제로 남겨지지만 인식의 힘을 키워나가는 과정과 깊은 사색과 성찰은 우리가 지향해야 할 방식이 아닌가 싶다.
커뮤니티에서 출간된 평화교육시리즈 중 한 권인 <지쿠호오 이야기>를 읽으면서 개인적으로 만감이 교차했다. 내 아버지는 일본에서 태어났다. 탄광 갱도가 무너져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4살 때 한국으로 돌아오셨다. 할아버지와 할머니 사이에 세발 자건거를 탄 아버지의 모습이 흑백 사진으로 단 한 장 남아있다. 그 사진이 내가 알고 있는 할아버지에 대한 전부이다. 한국에 돌아와 친척들의 도움을 받으며 세 딸과 외동 아들을 키우셨던 할머니의 이야기는 전설처럼 혹은 그 시절 모든 어머니의 이야기로 친척들이나 고모들에게 후일담으로 명절 때마다 귀동냥하며 자랐다.
할아버지가 일했던 탄광이 어디였는지 궁금하지도 않았고 어떻게 건너갔는지 물어본 적도 없다. 나와 관계없는 너무 먼 이야기였고 아버지도 할아버지의 얼굴조차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에 전설처럼 가끔 흘려듣곤 했었다. ‘아이들의 힘으로 만들어가는 나라 운동본부’라는 이름이 긴 단체에서 이런 책을 만들고 번역해서 한국에서 출판한다는 것은 역사 바로 알기에 대한 중요성을 다시 한 번 일깨우는 일일 것이다. 일본이라고 해서 왜 지극히 정상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이 없겠는가. 한국의 학생들에게 얼마나 큰 도움이 될까마는 맹목적인 일본문화에 대한 추종이나 비이성적인 반일 감정이나 위험하기는 마찬가지다. 바로 알고 올바로 인식하는 데서부터 한일 관계는 재정립되어야 한다. 더욱이 지나간 역사에 대한 왜곡이나 우리가 걸어온 길에 대한 이해가 없다면 아픈 과거에 대한 반성도 성찰도 그리고 미래를 향한 제대로 된 방향 설정도 쉽지 않을 것이다.
지쿠호오는 일본의 대표적인 탄광을 말한다. 이곳은 단순히 메이지 유신 당시부터 일본의 부의 원천과 상징이 되는 곳이 아니다. 근대화가 이루어지기 시작하면서 한 나라의 부국강병을 위해 민중들이 쏟았던 피와 땀의 현장이다. 일본의 대표적인 탄광이 단순히 그들만의 문제였고 과거였다면 우리가 돌아볼 필요가 없을 것이다. 문제는 그곳이 한국인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19세기 말부터 시작해서 일제 강점기 이후에는 한국인의 수가 급증했다. 토지몰수와 생활난을 이기지 못한 반강제적 이주 노동자들의 삶은 비참했다. 상상을 초월하는 노동시간과 인간 이하의 노동 환경은 짧은 설명과 간단한 삽화였지만 남의 일 같지 않아 가슴이 먹먹했다.
다른 역사책을 통해 객관적으로 서술된 텍스트를 접하는 것과 달리 이해를 돕기 위한 그림들이 상징적이었지만 상세한 설명보다 오히려 깊은 인상을 남긴다. 지쿠호오 이야기 뿐만 아니라 야마에 살았던 사람들 그리고 한일 병합과 연락선에 실려온 사람들의 이야기는 우리 근현대사와 뗄 수 없는 관계에 놓인 이야기들이다. 위안부와 징용에 동원된 한국인의 구체적인 수치가 분노를 배가 시키는 것은 아니지만 학생들이 이 책을 통해 그 심각성과 사실 여부 자체를 확인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된다. 다양한 교육 방법과 역사에 대한 접근 방법이 있겠지만 이렇게 민간의 노력과 적극적인 성과물들은 훨씬 더 효과적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런 노력과 과정들이 국가의 개념을 넘어서 연대와 참여의 장을 만들어 갈 수 있다는 가능성의 문제이다. 단순히 한국과 일본만의 문제가 아니다. 이 책에도 언급되어 있지만 중국과 동남 아시아 여러 나라가 모두 연계되어 있는 역사이다. 국가와 국가간에 벌어진 전쟁의 원인과 결과를 분석하자는 것이 아니라 지나간 역사 속에서 가장 큰 피해자는 누구였을까를 생각해 보자. 국경을 넘어 전쟁터에서 총을 쏘며 아비규환의 지옥을 헤매였던 그 많은 사람들을 과연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해 싸웠을까? 갱도에서 숨이 막혀 생손톱이 다 빠지도록 벽을 긁다가 질식사한 사람들의 시체에는 성한 손톱이 하나도 없었다는 이야기를 나는 이 책보다 먼저 살아 있는 사람들을 통해 어린 시절에 전해 들었다. 그들은 한국인이기 때문에 분노해야 하는가?
하방연대는 계층과 계급을 넘어 국경을 넘어 현실 속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과 이루어져야 한다. 잘못된 과거의 역사를 돌아보고 분명히 알아야 한다. 그들만의 전쟁과 그들만의 갈등 속에서 대다수 민중들의 모습은 어떠했는지, 우리가 무엇 때문에 그리고 누구를 대상으로 싸워야했는지 먼저 깨달아야 한다. 그 원인과 문제점들을 짚어보면 실타래가 풀리듯 해결방법도, 대안들도 찾아지게 된다. 물이 빠지고 바닥이 드러나듯 그렇게 선명하고 정확한 눈을 갖게 될 것이다. 이 책은 미래의 주인이 될 청소년들에게 뿌연 시야를 걷어낼 수 있는 역할을 할 수 있다는 데 의의가 있을 것이다.
한 가지 아쉬움이 있다면, 삽화와 일본어 원문 표기라는 방식을 택한 나름의 이유가 있겠지만 책이 크고 무겁고 비싸다. 군살을 빼고 좀 더 가볍고 저렴하게 접할 수 있는 책으로 만들어졌으면 좋았겠다. 하지만 우리가 미처 몰랐던 일본의 민중사와 조선인 탄광 노동자의 삶을 어렵지 않게 접근할 수 있는 책으로 손색이 없다.
070719-0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