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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끄러지는 말들 - 사회언어학자가 펼쳐 보이는 낯선 한국어의 세계, 2022 세종도서 교양부문
백승주 지음 / 타인의사유 / 2022년 4월
평점 :
고통이 사회 구조적 폭력에서 기인했을 때
공동체는 그 고통의 원인을 해부하고 사회적 고통을 사회적으로 치유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 김승섭, 『아픔이 길이 되려면』중에서
한 인간의 죽음에 대한 평가와 해석은 제각각일 수밖에 없다. 개인적 관계, 사회적 시선에 따라 사자死者의 삶을 다르게 바라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노사이드, 전쟁, 천재지변, 교통사고, 여객선 침몰, 비행기 추락, 교량과 백화점과 아파트의 붕괴에 이어 압살 사고를 목도하고 난 후에 사람들의 반응은 어떤가. 꽃다운 나이의 죽음을 애도하고 추모하는 일은 모든 인간에 대한 예의다. 그 원인과 결과 사이를 미끄러지는 말들은 칼날이 되어 산 자들에게 상처를 남긴다. 함부로 뱉은 말은 휘두른 주먹보다 가학적이다. 우리 주변에만 존재하는 ‘선량한 차별주의자’는 누구이며, ‘미끄러지는 말들’을 하는 사람이 따로 있을까. 나는, 그리고 당신은?
백승주를 사회언어학자로 명명한 게 누구든 발화 의도와 목적에 맞는 의미를 차자고 그 말들이 흐르고 흘러 닿는 곳에서 제 기능과 역할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급식체와 인테넷 약어, 비속어 등 우리말과 글을 가꾸고 지키자는 PC한 잔소리도 아니고 혐오와 차별의 언어 사이사이에서 공동체의 도덕심을 고양할 목적도 없다. 어쩌면 백승주는 자기 삶을 더듬고 일상을 살피며 지극히 개인적인 관점과 고민들이 자기 언어 안에서 어떻게 고이고 어디로 흘러가는지 가만히 바라보고 있는게 아닐까.
특별하지 않은 사람들의 평범하고 진솔한 이야기가 울림을 가지려면 특수성 안에서 보편성을 획득해야 한다. 구체적 경험은 생각을 통해 단단히 벼려지고 타인에게 닿아 온기를 전하거나 찬물을 끼얹어야 한다. 무엇이, 어떻게 잘못된 걸까. 그 원인과 대책은 바람직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가. 도저히 손쓸 수 없는 자연재해도 아니고 교통수단에 의한 사고도 아니며 이기적 목적의 살육전쟁도 아닌 저 수많은 죽음 앞에서 그들의, 아니 우리들 혀에서 미끄러지는 말들은 결국 인간에 대한 예의와 세상을 향한 태도를 고스란히 드러낸다. 정치인들뿐만 아니라 어느 자리에서 무엇을 했든 사고에 대한 반응, 문제를 해결하고 책임을 묻는 과정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가만히 지켜볼 일이다.
백승주는 표준어와 일상어, 폭력과 재난 혐오와 차별의 현장에서 미끄러지는 말들을 꼼꼼하게 점검하고 한국어 교실에서 경험한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낸다. 그리고 언어 너머의 의미를 더듬는다. 여러 글들을 모은 책으로 체계와 구성이 단단하지는 않으나 우리 사회에서 사용하는 언어는 결국 공동체 구성원 전체의 집단적 무의식을 드러내며 우리 사회의 문화, 전통, 현재와 미래를 가늠하게 한다.
가끔, 사람들은 ‘말실수’라며 눙치고 넘어가거나 오해를 풀라고 하고 양해를 강요한다. 그러나 대개 그 실수는 무의식의 반영으로 평소 생각과 태도 자신의 신념이 고스란히 드러난 말들이다. 감추고 싶거나 입 밖으로 내뱉지 말아야 할 말들이 혀에서 미끄러졌으니 급정거하는 버스 안에서 타인의 발을 밟는 진짜 실수와 구별되는 가짜 실수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며 하나의 세계다. 우리는 우리가 하는 말, 보내는 메시지, 써놓은 SNS, 심지어 메모와 낙서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한다. 미끄러지는 말들이 우리의 생각이며 태도이고 자기 정체성이 아닐까. 말과 글을 조심하고 삼가야 하는 게 아니라 평소 타인과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과 태도를 성찰할 일이다. ‘마인드 리딩Mind Reading’과 ‘공감Empathy’능력은 본능이 아니라 학습과 노력의 결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