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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에 우리 영혼은
켄트 하루프 지음, 김재성 옮김 / 뮤진트리 / 2016년 10월
평점 :
노년은 주문하지 않은 택배다. 아무도 늙기를 원하지 않지만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시간이 다가온다. 시간이 흐른다고 해서 인간의 욕망과 외로움이 덜해지지 않는다. 밤에 우리 영혼은 평안과 안식을 원하지만 오히려 철저한 외로움을 느끼기도 한다. 친밀한 가족 관계, 애틋한 연인이 곁에 있는 사람이 노년에 그들과 이별한다면 상실감과 외로움은 배가 된다. 켄트 하루프의 마지막 소설의 주인공 애디와 루이스는 그렇게 특별하지 않은 인생을 살다 혼자가 된 여, 남 노인이다.
“우리 같이 잘래요?” 용기를 낸 건 여성인 애디다. 성별이 바뀌었다면 아마 이 소설의 성격이 달라지고 또 다른 논쟁에 휘말렸을 수도 있었으리라. “라면 먹고 갈래요?” 보다 직설적이나 전혀 애로틱하지 않은 돌직구는 루이스에게 가 닿는다. 44년간 한집에서 산 70세 여성 노인의 제안에 47년째 가상의 도시 홀트 시에 거주하는 남성 노인은 고민 끝에 이를 수락한다. 저녁에 건너가 잠을 자고 아침에 돌아오는 일상이 이웃과 타인들의 눈에 곱게 비칠 리 없다. 그들의 외로움보다 관계를 규정짓는 일반적 시선과 각자의 도덕적 기준이 이 소설을 혼란스럽게 바라보게 한다. 혼자 사는 두 남녀 노인의 만남에는 문제가 없으나 법적으로 혼인 관계를 형성하는 데 따른 현실적 문제들 ― 이를 테면 유산 상속과 자녀들과의 관계 등 ― 앞에서 노인들은 절망한다. 아니, 쉽게 포기한다. 애디도 마찬가지다. 손자를 이기는 할매는 없다. 자식이 가로막는 노년의 위로와 행복이라니. 지나치게 현실적인 결말 앞에 모임에 참석한 분들의 의견이 갈렸으나 두 사람이 찰떡같은 티키타카는 환타지에 가깝다. 그들의 대화, 정서적 공감, 따로 또 같이 나누는 일상 등 이상적 연인의 모습이 오히려 비현실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 앞에 굴복하는 관계 양상이 소설의 결말을 흐릿하게 한다.
소설 서두에서 애디는 루이스에게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관심 갖지 않기로 결심했으니까요. 너무 오래, 평생을, 그렇게 살았어요. 이제는 더는 그러지 않을 거예요.”라는 말로 자신의 남은 생을 이야기한다. 작지만 분명하고 주체적인 삶의 계획이다. 이 결심은 소설 중반에 다시 반복돼 애디의 결심을 재확인한다. 그러나 결국 자식과 손자가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관심을 갖는다. 200쪽이 안되는 중편 소설을 통해 작가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무엇이든 독자들은 또 각자의 입장에서 노년의 성과 사랑, 자식들과의 관계, 현실적인 문제 등 다양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다. 모두가 상찬하거나 비난하는 소설보다 이렇게 다양한 반응을 이끌어내는 작품이 더 좋은 평가를 받아야 한다는 면에서 동의할 만하다. 그러나 개성있는 인물들을 통해 다양한 주제를 드러내는 장편 소설과 달리 중, 단편의 미덕은 칼날처럼 깊은 인상을 남기는 묵직한 한방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애디의 파격적 제안으로 시선을 끌었으나 과정과 결과는 모두를 행복하게 하는 해피엔딩의 환상도 없고, 현실에 대한 치열한 고민과 갈등도 없이 너무 쉽게 자식 앞에 무너지는 애디의 모습으로 끝을 맺는다. 전화기를 붙잡고 극복할 수 없는 현실에 대한 안타까움을 내뱉는, 소설의 마지막 문장인 애디의 “당신, 거기 지금 추워요?”는 “우리 같이 잘래요?”라고 제안할 때의 마음과 다르지 않다는 위로로 갈음되지 않는다. 루이스의 입장에선 어떤 답을 할 수 있을까?
외로움을 느끼는 정도의 차이, 혼자 사는 일상의 장단점, 노년을 위한 준비와 가족 관계, 자기 욕망과 삶에 대한 적극적 용기 등 이 소설은 어쩌면 지극히 현실적인 노년을 위한 고민을 담은 켄트 하루프의 마지막 고백이 아니었을까 싶다. 태평양 건너 미쿡이든 한국이든 늙고 병들어가며 삶의 종착역을 향해 치닫는 사람들의 태도와 삶을 대하는 자세는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인다. 밤에 우리 영혼은, 그보나 낮에 우리의 삶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