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질문한다, 고로 존재한다.” - 「프롤로그」 중에서
“악이란 비판적 사유의 부재”라는 아렌트의 새로운 정의가 여전히 유효한 시대다. 사유하는 주체로서 스스로 생각하라는 칸트의 계몽주의 모토가 필터 버블, 확증편향의 정보 홍수 시대에 더욱 필요한 이유를 설명할 필요조차 없다. 스스로 질문하지 않으면 악인, 즉 나쁜 사람이 된다는 논리의 비약이 가능해진다. 성찰하지 않는 삶은 살 가치가 없다는 소크라테스의 주장은 민주주의를 시대를 사는 현대인에게 어떤 의미일까. 레거시 미디어에 기대 그들의 목소리를 대변하거나 주변 사람들의 말에 휩쓸려 사는 건 편안하지만 나와 타자 그리고 세계를 망치는 지름길이다.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의 명제 “지식은 권력이다knowledge is power”를 미셸 푸코Michel Foucault는 “권력은 지식이다power is knowledge”로 뒤집는다. 이것은 라틴어 격언 “어느 것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말라Nullius in verda”에 대한 도전이 아니었을까. 현재 우리가 목도하는 권력과 미디어, 정치와 종교의 협업 플레이는 사유하지 않는 사람들의 뇌 구조를 뒤튼다. 지식권력의 중심에 선 미디어와 냄새나는 신문과 기자들이 어디 한 둘인가. 알고리즘으로 유형화된 정보만 편협하게 흡수하는 정보 탐색은 균형을 잃고 삐뚫어진 우리들의 자화상을 보지 못하게 한다. 비판 정신이 결여된 미디어보다 심각한 건 필터링 없이 노출된 정보에 대한 맹목적 믿음과 태도다. ‘안다’는 착각에 빠지는 순간, 자신의 선택과 판단력을 의심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사 빅포르스가 『진실의 조건』에서 밝힌 명제 중 하나는 ‘지식은 우리 모두가 협력해 만든 창작물’이라는 사실이다. 각자 다양한 방식으로 기여해온 인식적 노력이 누적된 결과물인 지식을 바탕으로 한 진실은 떼거지로 우기거나 군중심리에 올라타거나 우매한 다수의 밴드왜건 효과와 분명한 차이가 있다. 지식과 진실을 다수결로 결정할 수는 없지 않은가. 집단지성으로 포장된 다수의 횡포가 언제나 우리를 바른 길로 인도하는 건 아니다.
강남순의 『질문 빈곤 사회』가 보여주는 문제의식은 여전히, 아직도, 그대로인 우리의 현실을 돌아보게 한다. 반성과 성찰은 인간을 다른 동물과 구별짓는 가장 중요한 특징이다. 나의 이익을 위해 최선을 다하며 욕망을 채우는데 충실한 삶은 동물과 다를 바 없다. 강남순은 우리 사회가 질문이 빈곤한 이유를 질문한다. 그것은 질문이 아니라 드러난 현상에 대한 비판이며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는 이정표에 가깝다. 권력과 언론에 묻는다, 타자의 얼굴에 묻는다, 관행과 대안에 대해 묻는다, 존재와 혐오를 묻는다, 희망과 생명을 묻는다.
전체 다섯 개의 주제로 묶었지만 개인을 둘러싼 타자와 세계에 대한 근원적 질문들이다. 우리는 언제부터 호기심과 질문을 땅에 묻었을까. 질문이 직업인 기자들조차 질문을 잃어버린 한국 사회는 여전히 선진국 신화에 들떠 있는 건 아닐까. 개인의 삶에서 질문은 성적, 취업, 재테크에 대한 노하우로 한정되기 쉽다. 그러나 대체로 근본적인 질문은 삶의 목표와 가치에 닿아 있다. 방향없이 흔들리면 모든 게 불안하다. 부족하고 먹을수록 배고프며 가질수록 가난해진다.
숱한 철학적 개념과 사회학 이론이 등장하는 책을 읽는다고 해서 자기 삶이 변한다면 얼마나 쉬울까. 든 사람은 빈 사람보다 굳기 쉽다. 끊임없이 의심하고 쉼 없이 흔들이며 앞으로 나아가려는 노력없이 인간은 귀한 존재로 거듭나기 어렵다. 성장을 멈추지 않는 일상, 생각하고 질문하는 태도가 우리를 좀 더 나은 인간으로 매일매일 다시 태어나게 할 뿐이다.
우리가 경험하는 고립isolation과 외로움loneliness을 창의적인 경험으로 전이할 수는 없는 것인가. 아렌트는 그것이 바로 고독solitude이라고 본다. 자신에 대한 신뢰를 회복하면서, 외로움을 고독으로 전환하는 지속적인 시도를 하는 것이다. 외로움과 고독의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외로움은 세상이나 주변 사람들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으로부터도 소외되는 것이다. 반면 고독이란 ‘자기 자신과 함께 있음’의 상태이다. - 33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