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론 3 - 상 - 2015년 개역판, 정치경제학비판 자본론 3
카를 마르크스 지음, 김수행 옮김 / 비봉출판사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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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관심은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도록 방치한다. 잉여가치율과 이윤율은 다르다. 그 전환과정에서 총자본과 가변자본 그리고 잉여가치의 비율과 변화에 주목하며 마선생님은 자본론 3권을 시작한다. 이윤율이 불변일 때와 변동하는 경우에 따라 경우의 수를 짚어보는 목적이 무엇일까. 결국 가변자본인 노동력에 대한 관심이다. 노동일, 노동시간, 노동강도는 잉여가치과 이윤율로 직결된다. 여기에 연간 회전율은 생산성의 영향을 받고 이것은 자본가의 이윤과 노동자의 임금, 노동강도와 노동일, 노동시간에 영향을 준다. 어느쪽이 우선하든 이 복잡한 수식 속에 숨은 뜻을 찾아내는 일이 자본론 공부의 핵심이 아닐까. 그것은 다른 경제학자와 다른 마선생님만의 독특한 '관점'이다.

​어떤 사회현상을 바라보는 수백개의 눈이 있다. 아니 수만, 수억 개의 카메라가 있다. 있는 그대로 비추지도 못하는 거울부터 뼈와 살을 꿰뚫어 X-ray처럼 객관적 사실을 투영하는 기계뿐만 아니라 그 원인과 결과를 찬찬히 헤아려보는 인식과 사유의 눈도 있다. 어떻게 볼 것인가, 무엇을 향해 어디로 갈 것인가. 중심축이 없는 회전은 어지럼증을 유발한다. 단단히 뿌리내리지 못한 생각들이 부유하며 세상을 어지럽힌다. 논리적인 근거와 이성적 판단이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 수 있을까.

하지만, 적어도 거짓과 선동을 걸러내고 현상과 본질을 구별하는 안목이 필요하다는 문제의식 정도는 공유할 수 있지 않나? 합의는 어렵지만 기준과 잣대마저 제각각이라면 그야말로 세상은 난장판이 될 것이다. 과학적 태도가 필요한 건 오히려 정치와 사회 그리고 경제 분야가 아닌가. 때때로 흘러가는 구름에 태양이 가려져 흐린 날도 있고 비가 오는 날도 있다. 곧 장마가 시작되면 청명한 가을 하늘을 기다리는 성급한 사람들도 있다. winter is coming. 무엇을 할 것인가, 레닌도 체르니셰프스키도 했던 고민을 우리가 계속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여기 그리고 거기에서도.

​자동차는 구입하는 순간부터 감가상각이 시작된다. 10년 동안 한번도 타지 않고 중고차로 팔아도 제값을 받을 수 없음은 물론이다. 농산품은 말할 것도 없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거래되는 거의 모든 상품이 그렇다. 자본가의 입장에서는 불변자본 사용을 절약한큼 이윤이 높아진다. 더 많은 노동력을 투자해서 초과임금을 지불해도 기계가 노는 꼴을 보고 싶지 않은 것이다. 노동자를 희생시키는 노동조건을 절약할 수도 있고, 생산폐기물을 이용할 수도 있으며, 발명에 의한 절약도 가능하다. 이윤을 높이는 또 하나의 요인은 가격변동이다. 원료가격의 변동은 이윤율에 직접 영향을 미친다. 자본의 가치가 증가하거나 감소하는 경우도 이에 해당한다.

잉여가치와 이윤, 잉여가치율과 이윤율 사이에는 다양한 요소가 놓여있다. 이들의 변화, 통제, 조절에 의해 자본가의 이윤율이 달라진다. 단순히 노동자에 대한 착취 뿐만 아니라 불변자본의 변화도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 마선생님은 3권에서 구체적인 이윤 발생 과정의 변화요소를 점검한다. 1편에서 주로 다룬 내용은 잉여가치율과 이윤율의 함수관계다. 어떤 요소 때문에 잉여가치율과 이윤율이 달라지면 그 요소들이 노동자에게는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서는 행간에 숨어 있는 의미를 읽어내야 한다. 퍼즐을 맞추듯, 레고블럭을 쌓듯 분석과 해석을 통해 하나의 거대한 형상이 만들어지는 걸까.

여러 단계, 혹은 여러 분야의 일반적 이윤율이 형성되는 과정은 상품의 가치가 생산가격으로 전환되는 과정과 다름없다. 마선생님은 여전히 우리가 어떤 상품을 구매할 때 숨어 있는 노동력, 즉 잉여가치의 의미를 되묻고 있는 듯하다. 이제 기업 간에, 상품 상호간에 경쟁이 시작되면 이윤율이 균등화되는 상황이다. 시장가격은 시장가치와 다르다. 초과이윤을 향한 수요, 공급의 자명한 논리도 작용한다. 여기에 임금의 변동이 생산가격에 영향을 미치면 이야기가 복잡해진다. 자본가들의 초과 이윤을 향한 열망은 이윤율 저하경향의 법칙 앞에서 좌절한다. 흥미롭다. 일반적인 이윤율이 점차 저하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자본주의 시스템의 필연성이라니. 나의 관심사는 노동력과 임금 그리고 잉여가치와의 관계다. 불변자본의 증가로 인한 이윤율이 낮아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일까. 규모의 경제를 통해 현대 자본주의는 다양한 방식으로 이를 극복하고 노동력을 착취하며 인간의 삶보다 자본의 욕망에 충실한 견고한 체제를 구축해왔다는 점을 우리는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이윤율 저하를 막기위한 몸부림은 다양한다. 노동력 착취가 증가하고, 임금을 인하하며, 불변자본을 낮추고, 상대적 과잉인구를 이용하며 대외무역을 활용한다. 그런 후에는 상품자본과 화폐자본이 상인자본으로 전환되는 과정을 살핀다. 상품거래자본과 화폐거래자본을 합쳐 상인자본으로 부른다. 이것이 산업자본과 어떻게 다른지 살펴보는 과정은 자연스럽게 상업이윤의 특징을 들여다보게 한다. 상업자본의 회전과 가격이 노동자의 삶에는 어떤 영향을 미칠까. 유통은 전체 자본주의 생산양식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지만 여전히 그 중요성이 간과되기도 하고 폭리를 취해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각종 포털 사이트, 인터넷 서점, 홈쇼핑이 그렇다. 마선생님이 지금 이 꼴을 본다면 이들이 착취하는 대상이 노동력 뿐이라고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거대 상업자본이 상품거래와 화폐거래에 지나치게 집중하고 있는 현실이 떠올랐다. 결국 이윤율을 높이기 위한 경쟁과 소상공인, 산업자본의 피해는 각 분야의 노동자들에게 돌아간다. 대체로 산업 구조와 자본의 형태만 달라졌을 뿐, 오늘 우리가 겪는 현실도 이윤 창출의 도구와 그 수혜자는 극소에에 몰려 있다는 사실에는 다름 없다. 기업 상장 후 분할 매각으로 천문학적 거금을 손에 쥔 몇몇 자본가 외에 누가 첨단 산업의 꿀물을 빨고 있는가.

아주 오래된 옛날 이야기에 빠져 생산, 산업, 상업 자본의 구조를 들여다보는 과정이 메마르고 냉혹하다. 감정없는 서술, 마선생님의 분석에 주관적 해석이나 오해가 덧붙여질까 극도로 자기 검열을 하듯 냉정하게 서술하는 엥선생님의 서술 태도가 칼날처럼 예리하다. 1권과 같은 냉소와 문학적 비유도 없고, 행간의 숨은 탄식도 줄었다. 2, 3권의 차분한 분석을 1권과 비교할 순 없지만 자본주의 전체 구조를 살피기 위해서는 반드시 살펴야 하는 대목들이다. 세상은 그때나 지금이나 생각보다 복잡하다. 그리고 철저하게 각각의 이해관계에 따라 움직인다. 푸른 하늘도 잠시, 하늘은 금세 잿빛이다.

생산수단의 소유 여부와 노동력이 문제가 아니라 이제 화폐거래자본에 대한 이야기는 상업거래자본처럼 자본 그 자체가 살아있는 유기체로 기능하듯 생산물과 노동력 사이에서 꿈틀거리기 시작하는 느낌이다. 상인자본의 역사적 고찰을 통해 아주 오랫동안 유통과정에서 발생하는 상업자본의 존재를 고찰한다. 근대적 중상주의도 여기에서 비롯된다. 이자를 낳는 자본으로 인해 이제 이윤은 모두 기업가의 이득으로 돌아가지 않게 되었다. 잉여가치의 양적인 분할에서 질적인 분할이 생기고 그것이 또 다른 방식으로 이자율과 가치 사이의 관계를 형성한다.

이자는 이자를 낳고 불황기에 이율이 더 높아지던 '지금 이대로!'를 외쳤던 IMF 시절이 떠올랐다. 결국 호황이든 불황이든 가진 자는 더 큰 혜택을 얻고, 피해는 최소화한다. 제도가 바뀌고 경제상황이 달라져도 마찬가지다. 현실은 자본주의 시스템을 이해한 자와 이용하는 자 그리고 무지한 자와 용감한 자에게 지나치게 가혹하다. 선한 얼굴로 '자유'의 가치와 '평등'의 미소를 짓지만 현실은 칼날처럼 냉혹하다. 누구에게 이익이 돌아가며 그 분배는 어떻게 이루어지는 살피는 제5편의 이야기는 그 원리와 무관하게 여전히 바뀌지 않은 기본적인 체제와 시스템의 구조에 대한 의문을 갖게 한다. 우리는 과연 괜찮은 방향으로 걷고 있을까? 이대고 괜찮은 걸까?

기능자본가에게 귀속되는 산업이윤 또는 상업이윤은 총이윤에서 이자를 제외한 부분이다. 자본이 인격화되어 자기 자본으로 사업을 할 때는 자본의 사용자는 자본의 단순한 소유자와 자본의 사용자로 나뉜다. 이자는 자본과 노동 사이의 대립이 아니라 두 자본가들 사이의 관계로 나타난다. 드디어 이자낳는 자본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이제 본격적으로 자본은 신용을 바탕으로 가공의 자본을 창출한다. 화폐자본은 끊임없이 축적되고 신용에 의한 자가 발전이 가능해진다. 신용제도는 생산력의 물질적 발전과 세계시장의 창조를 촉진한다. 이는 현대 금융자본주의의 시금석이 되었으리라.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에서 출발한 화폐는 어떻게 자본으로 탈바꿈하는지,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이자를 낳고 산업자본, 상업자본으로 변화 발전하는지 살피는 동안 잉글랜드 은행과 금융시스템 전반을 돌아보게 된다.

이미 초기 산업화사회를 지나 돈이 돈을 버는 시스템으로 발전하고 그것이 전세계를 지배하는 과정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마선생님의 분석과 엥겔스의 정리는 냉정하게 현실을 꼼꼼히 들여다보며 기존 정치경제학이 해명하지 못한 부분을 분명히 짚고 그 원인과 결과를 분석한다. 이 지난한 과정을 통해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분명하다. 예상되는 문제점, 말하자면 경제공황이나 노동력 착취, 산자본가와 금융자본가에게 집중된 부의 편중이 합법적으로 이 세상이 굴러가는 시스템으로 정착되었으나 문제는 끊이지 않았고 지금도 여전히 그렇다. 과거를 돌아보며 현실을 살피는 안목을 가져야 하는 건 정치인, 기업가가 아니라 바로 우리와 같은 노동자와 평범한 시민이다.

​은행자본은 화폐와 자본으로 구분되어 있다. 화폐가 질제로 가장 뛰어난 자본이라는 주지의 사실을 통해 자본주의적 생산이 발달한 나라들에서 은행의 준비금이 얼마나 막강한 위력을 발휘하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다. 화폐적 자본과 현실적 자본의 차이는 분명하다. 신용을 바탕으로 한 현대 금융의 초기 버전도 지금과 다르지 않다. 산업활동과 상업활동에 '신용'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상상의 질서체계를 통해 인간의 이룩한 문명과 경제 체제는 감탄스럽다. 공황기와 불황기에 화폐자본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 이자율이 상승하면 증권의 가격이 하락 이유는 무엇인지에 대한 분석은 자본주의 구조의 근간을 들여다보는 일이다. 화폐가 대부자본으로 전환되고, 신용제도 아래 유통수단으로 활용되는 어음과 은행의 준비금은 어떤 식으로 경제를 움직이는가. 통화주의자들의 주장, 1884년 영국의 은행법 등은 당대 현실에 대한 세밀한 분석으로 지루하다. 자본주의의 발생지인 영국과 스코틀랜드의 은행법 제정과 문제점이 오늘에도 시사하는 바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거시적 관점으로 이 책을 살피고 싶은 개인적인 이유로 빠르게 넘어갔다.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 종교, 화폐, 제국, 자본주의 등 '상상의 질서'를 통해 인류 문명을 발전시켜왔다고 분석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걸 믿는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 걸까. 그 힘이 왜곡되면 맹목적 신념, 성찰없는 편견을 맹신하게 된다. 당대 정치경제학에 대한 분석과 비판을 통해 걸어야 할 길과 방향을 점검했다는 점에서 마선생님의 자본 이야기는 여전히 숙고할 만한 게 아닌가 싶다. 누구나 각자 옳다. 팩트fact 조차 크로스체크가 안되는 일들이 허다하다. 들은 이야기, 본 이야기, 경험한 이야기, 학문적 이론, 과학적 실험도 그렇지 않은가. 눈을 크게 뜨고 생각을 열어 놓는 태도야말로 한 인간이 죽기 전에 도달해야 할 목적지가 아닐까.

금본위 화폐제도에서 귀금속의 보유량은 수출과 수입에 의해 물가에 영향을 미치고 퇴장화폐을 좌우한다. 환율은 국가경쟁력과 GDP와 국제 신용등급의 영향을 받는데 그 기능과 역할은 18세기부터 조금씩 자리잡아온 질서에 바탕을 두고 있다. 자본주의 이전에 고리대는 '악'의 표상이었다. 교회가 그 거래를 금했하기도 했고 이자낳는 화폐유통을 용인하지 않던 시대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본은 그 모든 금기를 무너뜨렸다.

이제 초과이윤이 지대로 전환되는 차액지대설을 살펴보며 마선생님은 농업생산이 자본가에 의해 추친되며 벌어지는 일들을 분석한다. 차액지대의 형태와 생산가격이 불변, 하락, 상승하는 경우에도 자본은 손해보는 일을 하지 않는다. 차지농업가farmer는 공장의 노동자와 어떻게 다를까. 자기 토지를 소유한 자작농과 다른 그들의 삶을 들여다보기 위해 이 복잡하고 지루한 경우의 수를 따져가며 이익이 누구에게 돌아가는지 따지는 건 아닐까.

인간은 이기적 동물이며 자기 본능을 이기기 어렵다. 눈부신 성취를 이루거나 대다수에게 존경받는 이는 인간적 극기를 통해 범상치 않은 욕망을 가진 사람이다. 자본의 시선으로 바라보면 어디 한군데 '이윤'을 따지지 않아야 하는 곳이 없다. 타인과의 관계, 용기와 절제, 기쁨과 슬픔의 표현마자 그러하다. 누군가는 무엇을 향해 어떻게 살 것인지 묻고 있으나 그것이 팔릴 물건인지 대다수 사람들의 관심과 욕망에 닿아 있는지가 관건이다. 돈이 되지 않으면 만들진 않는 게 자본주의의 속성이다. 무엇을 할 것인지 물었던 수많은 사상가들이 여전히 우리에게 질문을 멈추지 않는 이유는 각자 다르게 생각하지 않을까.

리카도는 토지의 지대가 생산물의 가격과 생산비를 초과하는 이윤이 발생할 때 지급된다는 생각이었으나 마선생님은 토지 소유 자체만으로도 지대가 발생한다는 절대지래를 주장했다. 최열등지에서 차액지대가 발생한다는 것은 자연이 가치를 결정하는 건 토지의 위치와 비옥도만으로 설명할 수 없다. 생산가격을 넘는 가치의 초과분에서 절대지대가 발생한다는 생각은 토지소유자가 초과이윤을 지대로 환수한다는 분석이다. 차액지대와 절대지대는 토지의 위치와 비옥도 혹은 노동력이라는 초점의 극명한 차이를 드러낸다.

생각의 차이는 관점을 차이를 만들고 보는 눈이 다르면 세상의 빛깔과 향기도 다르게 느껴진다. 하나의 고정된 프레임을 깨고 다른 프레임으로 한번쯤 세상을 바라볼 수는 없을까. 이제 이념을 내려놓고 설익은 도덕과 윤리를 벗고 옳고 그름을 따지기 전에 조금 다른 방식으로 인간과 세상을 바라보는 여유를 가질 때도 되지 않았나. 언제까지 '불안 마케팅'에 시달리며 위기를 넘어 또 다른 위기가 온다는 협박으로 자기 삶을, 타인과 국민의 삶을 어둡게 할 텐가. 진짜 위기와 절망 때문이 아니라 더 큰 욕망을 채우고 함께 살아가려는 노력이 부족해서 그런건 아닐까.

​개개인의 사적 소유는 인간에 대한 인간의 사적 소유와 마찬가지로 불합리한 것이라는 마선생님의 지적이 뼈아프다. 숱한 반론이 있을 수 있으나 가족, 근대국가의 탄생 기반이 된 사적 소유는 인간의 본성도, 필수불가결한 문명의 성립 조건도 아닐 수 없을까. 무한대로 증식되는 인간의 욕망과 실제 현실로 나타나는 빈부격차의 심화가 낳을 결과는 뻔하다. 자본주의는 인류가 발명해 낸 최고의 경제체제가 아니다. 미국과 스웨덴의 자본주의가 다르다. 자본주의적 지대의 기원에서 노동지대, 생산물 지대, 화폐지대로 나누어 분익소작과 소농민적 분할지 소유는 결국 자본, 토지의 소유 여부로 판가름난다. 마지막 7편 수입들과 그들의 원천으로 자본론은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48장 삼위일체의 공식에서 '자본-이윤(기업가이득+이자), 토지-지대, 노동-임금; 이것은 사회적 생산과정의 모든 비밀을 지니고 있는 삼위일체의 공식이다.'라는 지적은 고전 경제학과 속류경제학에 대한 지난한 연구 결과에 대한 잠정적 결론이다. 애덤 스미스도 이윤, 지대, 임금을 분석하지만 그 잉여가치의 발생원인과 과정에 대한 해석은 마선생님과 다르다. 자본 나리와 토지 마님이 지배하는 세상은 영원할까.

자본론이 출간된지 150여 년이 지난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은 얼마나 달라졌을까. 산업구조와 문명의 발달은 눈부시지만 자본과 토지 그리고 인간의 노동력이 창출하는 이윤, 지대, 임금의 트라이앵글은 변함없다. 조금 더 상상력을 발휘하는 제도와 체제는 불가능할까. 현실 부정이 아니라, 목적지와 방향을 다르게 설정하는 건 가능하지 않을까. 모두 함께 꿈을 꾸면 현실이 된다. 실현 가능한 다수의 행복, 경쟁보다 나눔과 배려가 먼저인 세상은 불가능하지 않다. 결국 고전은 현실을 들여다보는 현미경 혹은 망원경이다. 지금-여기에서 우리 삶의 모습을 돌아보고 내일을 전망하며 마선생님의 고민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다시 한번 돌아보고 있다.

3권 마지막 부분은 생산과정을 다시 분석한 후, "상품의 가치는 상품에 포함되어 있는 노동량에 의해 결정되며, 임금의 가치는 필요생활 수단의 가격에 의해 결정되고, 임금을 넘는 가치초과분이 이윤과 지대를 형성한다는 것"이라는 말로 경쟁이 더 큰이익을 가져다 줄 것이라는 생각은 접으라고 충고한다.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을 다른 생산양식과 구별하는 두 가지 특징은 첫째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은 생남을 상품으로 생산한다는 점이며, 둘째는 잉여가치의 생산이 생산의 직접적 목적이고 결정적 동기라는 점이다. 물물교환과 잉여 생산물의 교환에서 시작한 기나긴 인류역사의 경제 체제가 자본주의라는 견고한 시스템으로 완성된 후 우리는 얼마나 행복해졌을까.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졌고 과학기술의 발달로 노동조건이 개선되었다는 사실은 틀림없다. 하지만 숨어있는 1인치를 발견하고 그 가치를 확인한 마선생님의 노고가 여전히 자본주의 미래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정치와 이념의 문제가 아니라 먹고사니즘의 문제로 귀결되는 현실이다. 우리의 모든 관심사는, 가장 인간다운 삶이어야 하는 부분까지도 블랙홀처럼 경제가 빨아들인다. 비인간적인 시스템인 자본주의의 중심에는 언제나 인간이 놓여 있다.

기나긴 여정을 마쳤다. 꼬박 석달동안(12주) 3,000쪽 분량의 자본론을 조금씩 공부하면서 지난 시간을 정리하고 남은 시간을 살폈다. "우리는 언젠가 죽는다"(데이비드 실즈)라는 명제 앞에서 익숙하게 죽음의 그림자와 마주앉아 저녁을 먹고 술 한잔을 거넨다. 2022년, 대한민국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예술, 노동, 환경, 과학 등 거의 모든 분야가 위기와 기회를 맞고 있다. 비단 특정 정치세력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삶이라는 자각이 없는 천박한 철학 앞에서 자주 절망한다. 정치와 연예인, 인플루언서에 대한 팬덤도 좋고, 불행이 없는 인스타그램의 마취적 행복 코스프레도 좋다. 현실을 바라보는 내정한 시선과 미래를 고민하는 대안 모색이 없는 세상은 절망에 취약하다. 때때로, 마선생님이 인용한 셰익스피어, 냉소적 위트, 당대 경제학자들과 속류 경제학에 대한 비판정신, 엥겔스의 노고와 든든한 지지, 인간과 사회에 대한 애정, 미래 사회에 대한 희망까지도 다시 돌아볼 생각이다. 이론의 발뒤꿈치라도 만져봤으니 그 이론을 통해 도달하고 싶었던 세상, 꿈같은 시대를 상상해 본다.

오지 않아도 좋다, 꿈꾸고 상상하며, 기다릴 수 있는 여유가 오늘을 살게 하는 게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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