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론 1 - 상 - 2015년 개역판, 정치경제학비판 자본론 1
카를 마르크스 지음, 김수행 옮김 / 비봉출판사 / 2015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아무리 좋은 사람이라도 내게 매력이 없을 수 있듯, 신성한 고전도 나에게 울림이 없을 수 있다. 그런 책이 한둘일까 마는 태어나 읽은 책에서 가장 많이 인용된 책은 아마도 칼 마르크스의 <자본론>일 것이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예술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수없이 마주쳤지만 <경제학 철학 수고>를 제외하고는 2차 저작들만 읽었다. 몇번의 실패 경험이 원전에 대한 두려움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긴 호흡으로 언젠가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 앉아 지나온 길을 돌아보고 짧지만 남은 날을 내다볼 힘을 빌릴 수 있으리라는 기대 아닌 미련이 남아 있는 책이다.

​​

2015년 개역판이 나오자마자 품절되고 안타까워하다가 다시 잊었다. 이제서야 2021년 11쇄를 샀다. 겨우 몇 천권도 안되는 서가의 책들 사이에서 자본론 1권은 다른 모든 책을 압도하는 듯하다. 지나친 의미부여가 아니라 그간 혼자 만든 마음의 빚 때문이기도 하다. 1989년에 초판이 나온 후 1991년, 2001년, 2015년에 걸쳐 다듬어진 문장에 뭐라 할 말이 없어진다. <2015년의 개역에 부쳐>을 읽다가 번역의 시간들이 눈앞에 떠올라 울컥했다. 선생님의 말씀대로 <자본론>을 쓴 마르크스에 비하면...번역에만 매달려도 한 평생이라는 한탄아닌 한탄이 새삼스럽다. 번역은 커녕 일독을 하는대도 일평생이 걸리는 사람도 있다.

​1권 1장 상품을 꼼꼼하게 읽었다. 번역자의 노고와 고민이 우둔한 독자 한명을 구하셨다. 놀랍게도 읽힌다. 그간의 숱한 2차 저작과 인용, 개념 설명, 이론과 적용을 통해 눈동냥을 한 탓도 있겠으나 천천히 읽기를 시작한다. 행여 오독은 재독으로 가리고 난독은 지독으로 이겨내며 눈이 침침할 때까지만.

​​

상품에서 노동의 가치를 읽어내고 본래적 사용가치와 구분되는 교환가치가 화폐로 전이되는 과정이 생각보다 어렵지 않게 서술되어 있다. 문장의 호흡이 조금 길거나 설명과 논리가 건조하지만 충분히 읽을 수 있을만큼 다듬어진 번역이다. 시간이 많이 흐르고 세월의 두께도 한몫 하겠으나 각자의 재미와 즐거움은 누구에게도 양보할 필요가 없다. 읽고 궁구하다 지칠 때까지.

상품과 상품의 교환 과정에서 발생하는 노동가치의 문제는 화폐와 상품의 유통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마르크스는 정치경제학 비판의 연속선상에서 당시 상황을 통해 상품과 화폐의 유통 과정을 상세히 설명한다. 셰익스피어의 대사가 등장하고 고대 철학자들의 날카로운 통찰이 인용되어 경제학이라기보다 마치 사회학에 가깝다. 본질적으로 경제는 인간과 사회의 구조 그리고 그 안에서 작동하는 욕망과 가치의 교환이라는 측면에서 살펴볼 수밖에 없는 것일까.

화폐의 유통은 지금 현재도 그대로 적용되는 기본적 개념이지만 '퇴장화폐'라는 용어를 보는 순간 슬픔이 밀려왔다. 지불, 유통수단이 아니라 무소불위의 힘을 가진 무한한 축적 가능성이 엿보이기 때문이다. 상품의 물신적 성격과 화폐의 관계를 면밀히 살핀 다음 이제 화폐가 자본으로 전환하는 과정을 살핀다.

고전 경제학과 당대 경제학자들의 이론에 문제점을 찾고 논리적 헛점을 지적하는 고단한 작업을 통해 마르크스가 바라본 세계의 변화 과정과 고민의 시간이 엿보이기 시작한다. 근본적인 문제를 살피고 본질을 헤아리면 현실과 미래가 조금 달리 보인다. 누구에게 이익이 돌아가는지 살피라고 했더니, 쿠이보노cuibono만 외치며 아전인수를 시작한 '기득권들'의 전쟁이 시작된 건가. 어느 한 놈도 국민을 팔지 않는 놈이 없다. 도대체 국민은 누구이며 어느 나라 국민인가.

상품과 화폐 그리고 자본의 차이를 분명하고 알기 쉽게 설명하는 자본론이 왜 쉼게 읽히지 않았을까. 배경지식의 부족이나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지 않을까. 흥미있고 재밌는 서술이다. 아재개그로 너스레를 떨기도 하고 비아냥거리기며 기존 이론이나 다른 경제학자들의 이야기를 논리적으로 비틀어버리기도 한다. 분명한건 상품자본과 산업자본 그리고 이자 낳는 자본의 일반공식과 그 모순을 지적하는 내용이 흥미롭다는 점이다.

자연스럽게 노동력의 구매와 판매가 등장했고 노동과정과 가치증식과정으로 접어들었다. 화폐가 자본으로 전환하는 과정, 노동력이 상품에 결착되는 과정또한 이미 익숙한 내용이지만 생생한 목소리가 분명하게 들린다. "자본은, 오직 생산수단과 생활수단의 소유자가 시장에서 [자기 노동력의 판매자로서] 자유로운 노동자를 발견하는 경우에만 생긴다."라는 문장이 그렇다. 노동과정과 가치 증식과정은 이제 불변자본과 가변자본으로 넘어가기 전 단계다.

긴 설명과 이론을 간략하게 요약하면 간단할 수도 있어 보인다. 이렇게 길고 상세하게 설명할 필요가 있을까 싶지만, 고전 경제학과 자본주의가 태동하며 본격적으로 궤도에 진입할 무렵의 다양한 이론들과 차별화된 '노동'에 대한 관점, 그 가치를 자연스럽게 이끌어내는 지난한 과정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다.

지구 반대편 잉글랜드 프리미어 리그에서 눈부신 활약을 펼치는 손흥민을 보면 만감이 교차한다. 축구 종주국-맨체스터와 리버풀 등 노동자들의 유일한 낙이었던 축구에 미친 나라 영국의 150여 년전 이쪽과 저쪽을 살피면서 지금, 여기를 생각한다. 노동절이다. 누군가는 여전히 죽음의 외주화를 정당하게 여기며 누군가는 비정규직과 정규직의 임금격차를 노력의 차이, 살아온 결과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얼만큼 나아진 걸까.

노동은 가변자본이다. 잉여가치율을 최대한 끌어올리기 위한 그들의 노력은 단 한순간도 멈춘 적이 없다. 시급 인상을 자영업자들의 어려움으로 치환하며 을들의 전쟁으로 유도하는 그들보다 그에 동조하는 사람들의 태도와 사회 경제적 계급 앞에 번번히 고개를.... 인간과 사회를 바라보는 각자의 관점과 태도가 자기 인생의 목표와 가치를 결정한다. 우리는 어디로 걷고 있을까.

하루 1850년 영국의 공장법은 하루 10시간으로 노동 시간을 규제한다. 그나마 법적 제한이 없는 산업 분야의 노동자들의 삶은 마르크스의 표현대로 단테의 상상한 지옥을 능가한다. 인간은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 끔찍한 행동을 해왔다. 날은 쉽게 저물고 시간도 생각보다 빨리 흐른다. 우리는 제대로 하고 있을까.

출판 마케팅에 대한 이해가 눈꼽만큼이라도 있었더라면 칼 마르크스는 <제10장 노동일>을 맨 앞에 배치했으리라. 확인해보니 <제15장 기계와 대공업>과 <제25장 자본주의적 축적의 일반법칙>을 제외하고 1권 전체에서 가장 많은 분량을 할애했다. 그만큼 중요하고 심각하게 당대 노동현실을 직시했다는 의미다. 스스로 밝히듯 상품과 화폐는 어렵고 딱딱하다. 처음부터 독자를 질리게 하지 않고 현실을 분석한 다음 문제를 제기하고 대안을 제시하기 위해 상품과 화폐부터 차근차근 설명했다면 어땠을까. 혼자서 자본론 1권 전체를 재구성해 보았지만 훨씬 나은 방법이라는 데 대부분 동의할 것이다. 제10장을 읽는 동안 왜 그간 자본론을 어렵다고 생각했는지 스스로 부끄러웠다. 진입장벽이 높아 아마도 긴장하고 읽은 제1편에서 번번이 넘어지지 않았나 싶다. 어쨌든, 11장 잉여가치율과 잉여가치량, 12장 상대적 잉여가치도 이해하는 데 어려움이 없다. 고전 경제학에 대한 신랄한 비판과 당대 경제학자들의 논리를 날카롭게 지적하는 분석과 체계적 설명은 놀랍다. 정교한 구조와 달리 설명과 예시, 문장 구석구석에는 위트와 재치가 숨어 있고 예상 반론에 대한 재반론 근거까지 숨겨 놓았다. 40대에 마르크스가 영국의 현실과 자본주의 구조를 바라보는 관점은 근본적으로 다른 곳에서 출발한다. 하나의 전제가 무너지면 이론 전체가 무너질 수 있는 위험성을 극복할 수 있는 힘과 자신감은 어디에서 비롯됐을까.

사람은 늙어도 생각은 낡지 않은 사람을 만나기가 힘들다. 나이는 젊지만 관점이 늙은 사람이 더 많다. 한 인간의 성장과 성숙은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일까. 무엇을 향해 어디로 걷든 관점과 태도가 현실을 바라보는 각자의 창문이 된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하며 자본론이 점점 흥미롭게 펼쳐진다. 자본론을 필사하며 읽는 동안 조금 더 천천히 그리고 넓고 깊게 세상을 바라볼 준비가 되어 있는지 나에게 물었다.

먼 옛날, 인간의 협업과 공동체 생활은 개별적으로 약한 존재인 인간의 생존 전략이었다. 농경사회를 거쳐 산업 혁명 이후에 '매뉴팩처'로 일컬어지는 공장은 가내수공업과 길드를 지나 본격적으로 자본주의적 성격을 띤다. 협업은 잉여가치 생산을 위한 수단으로 활용되었으며 이는 분업으로 세분화된다. 협업과 분업은 전통적인 인간의 생산활동이었으나 공장제 수공업인 매뉴팩처 단계에서는 인간을 부품으로 전락시킨다. 굳이 채플린의 영화 <모던 타임즈>(1936)를 떠올리지 않아도 중장년층에겐 익숙한 방식이다. 대한민국의 눈부신 성장도 결국, 70년대 산업화의 역군으로 일컬어지는 노동자들에 의해 가능했기 때문이다.

"매뉴팩처 시대에 비로소 독립된 과학으로 등장한 경제학"은 '인간'을 지우기 시작한 게 아닐까. 생산성, 성장률, 통계 등 숫자로 표현되는 인간의 가치는 현재와 미래에도 변함없이 지속되지 않을까. 과거를 돌아보며 오늘을 살피는 이유는 그것이 단순히 관점의 문제가 아니라 목표와 가치의 문제라는 사실로 귀결된다. '성장이냐, 분배냐'의 문제로 치킨 게임을 벌일 필요가 있을까. 성장이든 분배든 누가 얼만큼 가져가야 하는 고민보다 '인간'이냐 '자본'이냐의 문제로 환원할 순 없을까.

느린 호흡으로 읽다보니 이제 겨우 1권(상) 절반을 살폈다. 큰 흐름과 논리정연한 체계가 조금 보인다. 1800년대를 통찰했던 마르크스의 이야기가 왜 21세기에도 유효할 수밖에 없을까. 그것은 경제학 이론이나 천재의 혜안 때문이 아니라 여전히 대다수 노동자-스스로 아니라고 우기는 수많은 사람들과 관계없이-들의 고통과 불행이 계속되기 때문이 아닐까. <팩트풀니스>에서 한스 로슬링은 인간의 삶이 얼마나 비약적으로 발전했고 과거에 비해 말할 수 없이 풍요로워졌음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절대 빈곤과 삶의 질을 1800년대와 비교하는 게 가당치 않다. 그것은 몇몇 천재나 재벌들의 힘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일군 땀의 결실이기 때문이다. 잠시 호흡을 가다듬고,

『아동노동 조사위원회 보고서』가 지속적으로 인용된다. 현재 우리 사회의 노동부가 이런 역할을 담당한다. 공장법을 제정하고 노동자들의 실태와 현황을 파악한다. 감독관은 법을 어긴 자본가를 기소한다. 노동자와 인터뷰한 내용을 지속적으로 인용하며 마르크스는 1800년초부터 중반까지 매뉴팩처에서 대공업으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노동자들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파헤친다. 리카도와 존 스튜어트 밀, 맬더스(인구론 전체가 파렴치한 표절이라고 평가), J. S. 밀, A. 스미스 등 당대 경제학자들의 공과 과를 정확히 짚어가며 오류를 지적하고 '정치경제학'이 현실을 얼마나 도외시했는지 노동자의 관점에서 비판한다.

제15장 기계와 대공업은 180쪽 분량으로 1권 전체에서 가장 많은 분량이다. 엥겔스가 불어판, 독일어 4판에 추가한 내용이 포함되었기 때문일 수도 있으나 협업과 분업을 넘어 매뉴팩처가 어떤 방식으로 상대적 잉여가치를 극대화하고 있는지 그 과정을 꼼꼼하게 살폈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인용(아동노동 조사위원회 보고서 등)하며 잉여가치가 어떤 식으로 인간(성인, 아동, 여성 등 가족 구성원 전부)을 착취하는지 설명한다. 소름끼치는 것은 21세기의 김용균은 19세기에 출발했다는 사실이며 그것이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채 계속된다는 점이다.

문제없는 제도와 완전한 행복을 이룩한 사회는 없다. 모든 사람이 만족할 만한 경제체제도 인류사회에 실현한 적은 없다. 하지만, 반성 없는 미래는 존재하지 않는다. 현실의 문제를 인식하지 못하면 나만의 행복은 불가능하다. 타인의 불행이 나의 행복이 되는 세상은 가능할까. '자유'와 '민주주의'는 '평등' 앞에서 갈등한다. 누구를 위한, 누구에 의한 미래일까.

게도 상식과 정의와 공정과 자유와 평등의 기준은 제각각이다.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는 것처럼 노동자를 노동자라 부르지 못하는 노동부 장관을 보며 현대판 홍길동전을 보는 기분이다. 노동의 가치와 노동자의 권리에 대해 그토록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이 피땀흘려 싸웠으나 우리는 여전히 자본가의 시선으로 세상을 본다. 그건 아마도 언젠가 나도 자본가가 되겠다는 욕망에 교육체계, 사회적 편견이 덧씌워진 결과가 아닐까.

절대적, 상대적 잉여가치의 생산과 시간급, 성과급에 대한 분석은 자본주의 시스템의 기본 과정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팔것이라고는 몸뚱아리 밖에 없다는 한탄이 고급 지식 노동자에게는 해당하지 않는다는 착각이 노동 경시 풍조를 만들어 온 게 아닐까. 화이트 칼라든 블루 칼라든 노동력을 제공하고 영여가치를 생산하는 역할은 크게 다르지 않다. 잉여가치가 자본으로 전환되는 과정은 눈물겹다. 이제 그 자본의 축적 과정에 대해 살펴볼 차례다.

아주 더딘 발걸음을 옮기며 길고 긴 호흡으로 찬찬히 살펴보며 여전히 마음 한구석에는 현실과의 접점을 찾는다. 얼마나 달라졌을까, 어디까지 왔을까. 우리가 숨쉬고 사는 세상은 150여 년 전과 어떻게 변했을까. 양적 팽창과 물질적 풍요로움을 부정할 수 없으나 자본이 움직이는 시스템과 교묘한 잉여가치의 축적은 더욱 세련된 방법으로 그리고 더욱 다양한 방식으로 보이지 않게 우리를 길들인다. 조금 다른 시선이 필요하다. 언제든, 모든 순간에.

자본시장에서 노동력을 팔기 위한 몸부림과 피나는 경쟁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대학은 이미 자본의 하수인이 된지 오래다. 학과의 개설과 커리큘럼을 직접 설계하며 신입생 선발부터 입사까지 일사천리로 진행되는 노동력의 임도선매는 소름끼친다. 분야가 달라지고 형태와 방법이 바뀌었을 뿐 가만히 살펴보면 마선생님이 고민하던 시절에서 현실은 얼마나 달라졌을까.

상당한 분량을 할애한 제25장 자본주의적 축적의 일반법칙은 단순하다. 자본이 축적되는 과정에서 노동력의 수요가 증가함에도 불구하고 가변자본의 비율은 상대적으로 감소한다. 그러니 노동력의 과잉, 산업예비군이 생기고 노동자 간에 경쟁이 치열해진다. 인구의 증가, 감소에 따른 변화가 아니라 자본 축적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구조적 문제다. 여기에 과학 기술의 발달 등 생산수단이 점차 노동력 감소를 촉발한다. 그래서 “가난한 나라에서는 대중들이 편안하게 살아가고, 부유한 나라에서는 대중들이 일반적으로 가난하다.”라는 역설이 가능해진다. 이후 제5절에서는 잉글랜드와 아일랜드 등 실제 사례를 통해 이를 증명한다. ​

구체적인 자료와 현실을 다룬 부분은 어떤 소설보다 끔찍하다. 읽다가 잠깐씩 숨을 고르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찰스 디킨스의 『위대한 유산』(1861)이 정확히 이 시대를 반영한다. 성인 남성 노동자의 문제가 아니라 여성과 아이들까지 모든 인간의 생존 조건이 소설보다 참혹하고 생각보다 비현실적이다. 21세기를 오늘의 관점에서 보면 물질적 번영과 삶의 질을 비교할 수 없다. 그러니 충분히 긍정적으로 자본주의 체제를 받아들이고 현실적 대안 마련에 집중하는 것이 현명할까.

급진주의와 온건주의의 문제가 아니라 관점의 차이다. 기본 구조와 시스템은 달라지지 않았다. 물론 자본가와 노동자, 정부의 역할이 비교할 수 없을만큼 정교하고 복잡해졌으며 국가마다 다른 방식으로 운영되고 있지만 신자유주의가 휩쓸고 간 자리에 남은 흉터는 아직 아물지 않았다. 여전히 노동자를 근로자로 명명해야 하는 현실 인식은 유럽식 사민주의나 변형된 자본주의의 제도 개선에 큰 걸림돌이다. 이 시대를 사는 사람들의 의식이 바뀌고 세상을 이해하는 관점의 변화는 끊임없는 공부와 자기 혁신에서 비롯된다. 우리의 독서 현실, 토론 문화, 타협과 똘레랑스의 정신은 어디까지 왔을까.

긴 호흡으로 달려온 자본론 1권은 이른바 시초축적, 즉 자본의 근원을 캐묻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신학에서 원죄의 구실과 같은 정치경제학에서 시초축적은 땀흘릴 필요가 없는 사람들이 어떻게 출현하게 되었을까. 당연하게도 그 반대에는 임금노동자가 존재한다. 땀흘려 일하는 사람들이 없으면 일하지 않고 먹고 사는 사람은 있을 수 없다. "자본주의제체를 창조하는 과정은 노동자를 자기가 소유하던 노동조건으로부터 분리하는 과정―한편으로는 사회적 생활수단과 생산수단을 자본으로 전환시키며, 다른 한편으로는 직접적 생산자를 임금노동자로 전환시키는 과정―이외의 어떤 다른 것일 수가 없다. 따라서 이른바 시초축적은 생산자와 생산수단 사이의 역사적 분리과정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말에 비밀이 숨어 있다. 무소유는 법정 스님의 가르침이 아니라 시초축적의 출발이다. 생산수단과 생활수단을 소유하지 못한 사람은 누구나 노동자가 된다. 지적 능력이든 육체적 노동이든 무언가를 노동시장에 내다 팔아야 한다. 형태와 방법이 고상하다고 해서 본질적인 관계가 달라지는 건 아니다. 우리는 누구나 자신을 팔며 산다.

그 행위를 거부하는 일이 얼마나 힘겨우며 부질없는 짓인 줄 알기 때문에 모두 '건물주'를 향한 열망을 불태우는 걸까. 가장 편리하고 단순한 방법으로 유한계급이 되는 방법일 테니 연예인, 공무원, 정치인, 운동선수, 예술가, 종교인 할 것없이 모두 부동산과 건물에 쏟는 정성은 자본가가 토지와 생산수단을 소유하려는 욕망과 다름없다. 자본주의 시스템을 온몸으로 체감한 인간의 생존 전략이며 그칠 줄 모르는 당연한 욕망이다. 그러나, 그건 정의롭고 상식적인 세상과 거리가 멀다. 우리가 생각하는 공정과 합리의 정신은 열심히 일한 사람이 잘 먹고 잘 사는 세상이라고 믿지만

태어나는 순간부터 삶의 조건이 다른 사람들이 촘촘한 자본의 그물망을 뚫고 희망과 행복의 길을 안내하는 네비게이션은 자꾸만 출시가 늦어진다. 아니, 어쩌면 만들지 못하는 건가. 수많은 경제전문가, 사회학자, 정치인이 나서지만 현실은 우리의 바람과 멀어진다. 어찌보면 이유는 단순하다. 자본가가 아니어도 제 잇속만 차리는 소수에게 집중된 권력과 자본 때문이다. 이해충돌 방지법, 김영란법이 그들만의 리그, 침묵의 카르텔을 깰 수 있을까. 무엇을 위해, 어디를 향해 우리는 나아가는 걸까.

농민들로부터 토지를 빼앗고, 길드를 해체하고 가내 수공업이 사라진 자리에 매뉴팩처와 대공장이 들어서며 세상을 바꾸는 동안 그 달콤한 열매는 누가 다 가져갔을까. 자본주의적 차지 농업가가와 산업자본가의 탄생 과정은 자본주의적 축적의 역사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근대적 식민이론으로 마무리되는 1권은 서유럽에서 미국으로 그 시선을 돌린다. 지역적 특색과 국가별 상황에 따라 조금씩 다른 형태로 자본주의는 변화해왔다. 우리가 사는 21세기 대한민국의 자본주의는 안녕하신지 모르겠다. 아주 오래된 옛날 이야기를 듣는 기분으로 마선생님의 이야기를 듣다보니 영국의 자본주의 탄생과 현실을 넘어 우리가 걸어온 흔적들이 보인다. 자본론은 경제학 이론서가 아니라 당대 정치사회의 일면을 들여다볼 수 있는 역사이며 인간의 탐욕과 현실의 삶을 조망하는 돋보기와 망원경 역할을 동시에 하는 책이다. 이제 2권으로.

자본주의적 생산방식과 축적 방식, 또 자본주의적 사적 소유는 개인 자신의 노동에 토대를 두는 사적 소유의 철폐, 다시 말해 노동자로부터 노동조건을 빼앗는 것을 기본조건으로 삼고 있다는 점이다. - 1061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