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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소 - 세상을 이해하는 가장 작지만 강력한 이야기
필립 볼 지음, 고은주 옮김 / 휴머니스트 / 2021년 12월
평점 :
과학적 발견은 각 개인의 동기와 능력, 가끔은 특이한 성격에 좌우된다. 원소의 발견에는 통찰력뿐 아니라 결단력, 상상력, 야심이 필요하다. 물론 행운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 8쪽
거시적 관점으로 밤하늘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상상력은 무한하다. 코스모스의 세계에 대한 확장적 사고력은 인간을 우주로 보냈다. 반면 미시적 관점은 세상의 근본에 관심을 기울인다. 만물의 근원이 무엇인지 고민하기 시작한 인류의 생각은 철학적 고민에서 출발해서 이제 첨단과학의 영역이 되었다. 나와 세계를 미분하면 무엇이 남을까.
고교 졸업 후 처음 보는 주기율표는 흑백사진을 들여다보는 기분이었다. 원자 번호 30번 이후의 원소들은 외계어다. 비주얼 히스토리를 표방한 『원소』는 세상을 이해하는 또 하나의 방식을 제시한다. 원소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 가장 작고 원초적인 물질에 대한 호기심과 탐구의 역사는 단순한 흥미를 넘어 숭고함마저 느껴진다. 인간의 역사는 질문의 역사다. ‘왜’ 그런가,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가. 만물은 유전하지만 변하지 않는 것이 있을 거라는 희망 때문이었을까. 수많은 과학자들은 무엇을 바라 한평생을 그 작고 단단한 세계에 몰입했을까.
만물의 근원을 찾아 떠난 여행은 그칠 줄 모르는 열정으로 연금술로 이어졌고 전기로 분해한 원소에서 선 스펙트럼, 인간이 원소를 만드는 단계로 발전해왔다. 기초과학은 문명의 토대를 이루며 수많은 분야에 응용되어 인간의 삶을 혁명적으로 변화시켰다. 건축, 의학뿐 아니라 핵전쟁에 이르기까지 화학의 역할과 기능은 일일이 나열할 필요도 없다. 필립 볼은 원소의 사회적 의미와 철학적 접근을 배제한다. 철저하게 원소의 ‘역사’에 집중한다. 고대 철학자부터 최근의 사례까지 꼼꼼하게 점검하면서 객관적 사실들을 설명한다. 문명발달을 이끈 구리, 금, 은, 철에서 시작해서 주기율표의 마지막 줄 테네신, 오가네손에 이르기까지 각각의 원소에 얽힌 이야기를 풀어낸다.
이 책은 과학 이론도 실험 도구도 필요 없다. 주기율표를 암기해도 소용없고 실생활에 응용할만한 정도와도 무관하다. 원소 하나하나를 앞세워 그것이 발견된 경위와 인류에 미친 영향을 살핀다.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고 만질 수도 없는 궁극의 미시세계를 통해 우리는 세상을 또 다른 눈으로 살펴볼 수 있다. 작지만 아름답고 볼 수 없지만 느낄 수 있는 원소의 역사는 인류의 역사다.
소크라테스의 제자 플라톤이 아테네에 아카데미아를 세운 건 기원전 380년이다. 그 후로도 오랫동안 우리는 앎의 세계를 향해 거친 파도를 헤치며 항해를 계속했다. 눈부신 속도로 발전하는 현대 과학을 이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사는 현실의 어제를 살피면 겸손해진다. 한없이 낮은 자세로 세상을 살필 수 있다면 외부 세계를 조금 다른 눈으로 볼 수 있다. 각 장에 소개된 과학과 문명사 연표도 눈에 띈다.
초고속 인터넷 시대의 시초가 됐을 해저 케이블을 깔아 최초의 대서양 횡단 전신을 주고받은 건 1858년의 일이다. 자전거가 유럽과 북아메리카 전역에서 유행하며 급증한 시기는 1890년경이다. 먼 과거에서 최근까지 우리에게 익숙한 것들의 역사는 생각보다 짧고 또 생각보다 아득하다. 아주 잠깐 세상을 사는 우리가 알고 경험할 수 있는 지식과 정보는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언제나 그렇듯 정확하고 분명한 세계가 주는 안도감은 불확실한 미래를 사는 우리에게 다른 방식의 위로를 건넨다. 이치에 맞는 생각은 합의하기 힘든 수많은 인간에게 과학적 사고의 중요성을 깨우친다. 아주 작고 아름다운 원소의 역사를 통해 지금의 나를 돌아볼 수도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