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리언 반스의 아주 사적인 미술 산책
줄리언 반스 지음, 공진호 옮김 / 다산책방 / 2019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예술이 주는 지속적인 즐거움 가운데 하나는 의외의 각도에서 접근하여 우리의 걸음을 멈추게 하고 감탄을 자아내는 힘이다. - 347쪽

‘롤랑 바르트는 저자의 죽음을 선언했다. 텍스트를 저자의 의도에서 해방시키고 독자에게 자율권을 준 것이다.’ 마찬가지 논리로 화가의 죽음, 즉 예술가에게 사망 선고를 할 수는 없을까. 그림과 음악은 인간의 눈과 귀라는 원초적 감각 기관으로 수용한다. 표현론적 관점을 떠나 오로지 독자 혹은 관객에게 도달하는 순간 텍스트와 오브제는 철저하게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해석의 대상일 뿐이다. 도슨트의 설명이나 평론가의 비평은 누구 말마따나 소 등짝에 앉은 파리처럼 들리지도 않고 효과도 없는 잔소리에 불과한 게 아닐까. 줄리언 반스도 “화가는 그림에 대한 글을 쓰는 사람들을 깊이 불신한다.”라는 헨리 제임스의 말과 “한 예술형식을 다른 수단으로 설명한다는 건 무도한 행위다. 세상 모든 미술관에 해설이 필요한 그림은 단 한 점도 없을 것이다. 미술관 안내서에 설명이 많은 그림은 그만큼 좋지 않은 그림이다.”라는 말로 그림 설명 따위는 필요 없음을 강조한다. 닥치고 보라는 말일 터인데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쉴 틈 없이 화가와 그림에 대한 ‘뒷담’을 멈추지 않는다. 400쪽 가까이 떠들고 난 후 “이만하면 말은 할 만큼 했다.”는 문장으로 마무리한다. 요설에 가까운 수다와 소설적 상상력은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이자 단점이다. ‘아주 사적인’이라는 수식어는 매우 주관적이다. 미술 비평의 무게와 책임에서 자유로울 뿐만 아니라 애정 어린 시선과 자유분방한 형식으로 다양한 형식의 접근을 시도한다. 산책에 값하는 줄리언 반스의 속도에 발을 맞추면 화가들의 일기와 기록과 평론을 종합한 거대한 구조물 안으로 걸어온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마치 단단한 소설처럼 구체적이고 편안한 에세이처럼 다변적이며 비평처럼 날카롭고 진지하다.

비접촉, 비대면 시대라도 인터넷으로 그림을 감상하라는 말은 어불성설이다. 지식과 정보는 습득할 수 있는 예술이 내포한 아우라에는 근접조차 할 수 없다. 원본이 갖는 색감과 분위기뿐만 아니라 감상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는 그림의 크기를 가늠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예술가의 상상력을 즐기기 위해 관객의 추측과 오해를 덧붙일 수는 없지 않은가. 들라크루아의 <사르다나팔로스의 죽음>, 쿠르베의 <세상의 기원>은 책에 소개되어 있지 않아 아쉬운 대로 LCD 혹은 OLED를 거친 빛의 조각들이 망막에 투영된 그림자만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나는 책에 실린 화보 정도가 예술 감상의 최소한이라고 생각한다. 전쟁 기념관에서 본 클로드 모네의 <빛을 그리다>에 가서 느낀 허망함을 잊을 수가 없다. 시뮬라시옹(Simulation)으로 구축한 시뮬라크르(Simulacra)는 예술에 대한 조롱으로 느껴졌다. 개인적 취향이겠으나 눈의 간사함을 부추기고 간접경험을 권하는 사람들의 장난질로 여겨질 뿐이었다. 발터 벤야민이 무덤에서 벌떡 일어날 일이 아닌가.

하여, 현대인에게 예술이란 자기 삶을 고양시키는 최소한의 방편이거나 교양과 품위를 완성하기 위한 도구로 기능한다. 물론 예술이 유한계급의 고급스런 취미라는 사실은 여전히 불변의 사실이지만 대중에게도 그 기회가 주어진 예술 민주주의가 방구석 애호가들을 즐겁게 한다. 줄리언 반스가 아니라면 쓸 수 없는 미술 감상기는 그렇게 시작된다. 미술관에 가 그림을 감상하고, 도록을 뒤적이며 그림에 얽힌 매혹적인 이야기를 듣는 일은 오래된 추억 여행처럼 아련하다. 지난 역사의 단면을 살피고 당대를 살아낸 사람들을 관찰하고 시대의 아픔과 고통에 공감하는 일은 그림을 보는 또 하나의 방식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그린 화가들, 보이는 것을 자기만의 빛과 그림자로 표현한 그림들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예술적 감동과 영감을 선물한다. 텍스트로 전해지는 역사, 과학적 사실로 증명된 사실 너머에 이성과 감성이 어우러진 화가의 내면과 마주하는 일은 때때로 즐겁기만 한 일은 아니다. 재현된 과거는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수많은 말을 건네지만 그것을 받아들이고 해석하는 일은 순전히 개인의 몫이다.

줄리언 반스는 그 과거를 낭만주의와 사실주의를 거쳐 모더니즘에 이르는 시기로 한정한다. 이 시기는 1850~1920년 무렵으로 흔히 ‘벨 에포크belle époque’라고 명명한다. 좋은 시기, 아름다운 시절이라는 의미로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 인류 역사상 가장 자유분방하게 다양한 사상과 예술적 상상력이 발휘되던 시기다. 1946년생인 저자가 걸어온 삶의 궤적을 이해하기 위한 직전 시대에 해당하며 현생 인류에게 가장 추억하고 싶은 아름다운 시절이다. 소설가의 미술 이야기는 제리코에서 출발한다. 충만한 똘기로 가득한 화가의 성격은 물론 작품의 탄생 배경, 이면에 숨은 이야기는 소설가의 상상력을 자극하기에 충분해 보인다. 문학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예술작품은 시대정신을 반영한다. 당대의 역사적 사건, 사람들의 관심사, 사상사의 흐름과 세상을 보는 관점이 그림에 녹아 있다. 선과 색의 대결로 요약한 앵그르와 들라크루아의 자존심 대결은 흥미롭다. 르동에 의해 정신적인 색을 건드린 작가로 평가받은 들라크루아의 <사르다나팔로스의 죽음>은 화가 개인의 해석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벨 에포크의 그리스인이라는 세잔에 대한 평가, 쿠르베의 <세상의 기원>에 대한 해석 또한 익숙한 그림에 대한 새로운 접근이다. 무엇보다 흥미로웠던 화가는 발로통이다. 우울증과 신경쇠약으로 고생한 발로통의 <석양 풍경>(1919)이 매혹적이다. 그의 그림을 10년 단위로 구분해보면 일몰을 그리지 않은 시기가 없다. 하지만 그렇게 일몰을 그리면서도 일출은 전혀 그리지 않았다. 소개된 화가들의 그림을 일일이 찾아보며 읽어야 하는 수고로움이 있지만 책에 소개된 그림만으로는 이 책의 재미를 절반도 얻지 못한다.

예술가의 ‘도덕성’은 치욕에 가까운 말이지만 브라크가 보여준 엄결한 정신은 사적인 영역의 윤리의 문제와 차원이 다른 사회적 책무와 도덕적 태도를 의미한다. “브라크의 도덕적 권위는 공공연히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에 더욱 큰 영향력을 발휘했다. 그의 침착성과 침묵, 예술을 통한 사회참여에는 무언가, 부지중에, 도덕적으로 열등한 사람들을 폭로해내는 구석이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권위는 결국 그림 자체에서 나온다. 그 형태감과 균형감, 조화로운 색감―사실성에 대한 진지함, 예술에 대한 충실성―은 다름 아닌 도덕성에 기초한 것들이다.” 평범한 일상인으로서 삶을 대하는 태도, 타인과의 관계, 세상을 향한 발언은 그림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요소다. 법과 질서, 일상의 규범 안에서 상상력은 숨을 쉬지 못한다. 이 모순이야말로 모든 예술가의 삶과 작품을 이해는 가장 근본적인 해석의 도구라고 생각한다. 데이비드 실베스터는 1992년 연구서 마지막 구절에서 마크리트의 작품을 “일식이 일어날 때의 경외감 같은 감정”을 유발한다고 평가했다. 수많은 평론가의 해설과 마찬가지로 줄리언 반스의 설명 또한 객관을 가장한 주관적 감상일 지도 모른다. 하지만 론 뮤익의 《죽은 아빠》와 같이 예술은 문외한인 우리에게도 언어로 발화될 수 없는 깊은 울림을 주고 공감을 통해 상처를 치유하며 이성적 사유를 유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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