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의 이해관계
임현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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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과 거리감을 느끼기 시작한 이유를 알 수 없다. 아니, 굳이 확인하고 싶지 않은 지도 모른다. 특히 한국 현대소설과 심리적 거리감이 생긴 지 오래다. 취향은 변하고 입맛도 달라지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지만 자연스러운 변화에 의도적 거리 두기가 보태졌다. 그래서 오랜만이란 말이다. 임현의 단편들은 끊긴 듯 이어져 있다. 대개 소설집은 한 작가의 시절 관심이다. 현실을 바라보는 태도가 반영되어 인간과 세계에 대한 관점이 드러난다. 표제작 「그들의 이해관계」가 2017년부터 2020년 사이에 소설가 임현이 주목한 화두라고 할 수는 없겠으나 적어도 사람과 사람 사이에 놓인 ‘관계’ 양상에 천착했음은 틀림없어 보인다. 해주, 도경, 종구, 해원, 노아, 명조, 연재, 연희 등 등장 인물의 내적 갈등은 대개 관계로부터 출발한다. 소설이 아닌 현실도 마찬가지겠으나 원인을 알 수 없는 근원적 고독이나 존재론적 통증을 호소하는 인물은 드물다. 드물다는 말은 없지 않다는 뜻이다. 그러면 재미 없지 않은가. 현실의 반영론적 관점에서만 소설을 읽는다면 오히려 현실 도피 혹은 현실에 대한 외면이 아닌가.

1인칭 나레이터인 주인공이 겪는 일들은 누구나 경험할 만한 보편적 서사다. 누군가를 만나고 헤어지거나 사별하고 은퇴한다. 아내나 남편이 죽고 아버지가 사망한다. 비현실적이지는 않으나 확률이 거의 없는 일들이 벌어지고 부조리한 현실과 마주한 개인은 거대한 벽을 넘지 못하고 좌절하고 방황한다. 오죽 답답했으면 혼자 떠드는 한 편의 소설을 써야만 했을까. 임현은 현실의 이면을 드러내는 일보다 하나의 사태가 빚어내는 다양한 층위를 세밀하게 묘사하는 데 관심을 둔다. 어차피 이야기로 진실을 드러낸다거나 변혁을 시도하는 게 아니라면 현실의 단면을 드러낸 일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은가. “나는 그렇습니다. 사람이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어느 한쪽으로 너무 치우치게 되면 결국엔 경로를 벗어나 버리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어느 한쪽이 자꾸 좋아진다는 것은 누군가 나쁜 쪽을 떠안게 된다는 것 아니겠습니까.”(「그들의 이해관계」, 27쪽) 모든 이해관계는 쿠이보노cuibono다. 고대 로마인들이 던졌던 질문이다. 원인을 모르는 일이 벌어졌다면 가장 먼저 그 사건이 누구에게 도움이 되는지 질문하라는 것이다. 대개 관계가 절단나는 이유는 서로의 이해관계가 맞지 않기 때문이다. 이해관계를 금전적 득실로 오해하기 쉽지만 모든 관계는 평등하지고 서로의 이익이 균등하지도 않다. 물론 여기서 이익은 행복, 기쁨, 만족을 포함한다. 연인도 친구도 만나서 생기는 두근거림과 즐거움이 없다면 관계를 유지할 수 없다. 임현이 말하는 ‘그들의 이해관계’는 거시적이긴 하지만 남의 불행이 나의 행복이 될 수도 있고, 나의 불행이 타인의 즐거움이 될 수 있음을 증명한다. 소설의 본질은 이렇게 인정하고 싶지 않은 인간의 본심을 드러내고 욕망의 바닥을 보여주며 설명할 수 없는 관계 양상이 정리되지 않으면 깐다.

안톤 체호프는 “외로움이 두려우면 결혼하지 말라”고 조언했다. 사랑하는 연인, 결혼한 부부에게 외로움은 필수다. 무언가 극복하기 위해, 결핍을 채우기 위해 형성된 의존적 관계는 지속되기 어렵다. 아홉 개의 단편 중 「거의 하나였던 두 세계」에 오래 머물렀다. 경구 강박을 고백한 소설가 김연수는 시를 쓰면서 문학에 입문했음을 증명하듯 힘을 준 문장들이 독자를 사로잡는다. 단순한 미문이 아니라 생각의 깊이와 넓이를 확보한 문장들이 보석처럼 빛날 때 단편은 이야기의 재미를 넘어 영혼에 새겨진다. 윤대녕식 안개주의보와 달리 문체와 분위기가 독자를 무너뜨리거나 단단한 생각의 깊이와 아포리즘 같은 문장들이 오래 눈길을 끌기도 하는 경우가 그렇다. “관점에 따라 같은 것도 다르게 볼 수 있다는 말에는 만약 아무런 태도나 입장을 취하지 않는다면 무엇도 볼 수 없다는 점이 전제되어 있다. 요컨대 우리는 의미 있는 무언가를 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보는 무언가에 의해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셈이다.” 같은 문장이다. “나는 진실의 반대말이 주로 거짓이나 가짜라고 배워왔는데, 살면서 오히려 무지에 더 가까운 개념이 아닌가, 생각할 때가 많았다. 무엇보다 나는 종종 진실을 알고 있다고 오해할 때가 많았고, 그것이 잘못이라는 걸 깨닫는 순간은 대체로 무언가를 더 알게 되었을 때였으니까.”라는 문장도 마찬가지다. 외롭지 않으면 소설을 읽지 않는다. 동화 같은 현실, 행복한 하루하루를 사는 연인은 소설을 읽을 틈이 없지 않은가.

누군가는 오늘도 소설을 쓰고 어디선가 그 소설을 읽는다.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된 사람들은 읽는 동안 그리고 읽은 후에도 더 깊은 외로움을 느낄 수 있다. 누군가는 사람에 대해, 누군가는 세상에 대해, 또 누군가는 보이지 않는 미래에 대해 이야기를 짓는다. 그리고 우리는 읽는다. 읽는 행위 자체의 숭고함이 그 많은 이야기 너머의 세계를 가늠하게 하는 게 아닐까 싶다. 소설을 읽는 시간은 현실 밖으로 여행을 떠나는 시간이며 오롯이 자신과 대면하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소설가와 독자의 ‘이해관계’가 그렇게 잘 맞아떨어진다면 그것으로 충분하지 아니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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