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시체가 되고 싶어 - 유쾌하고 신랄한 여자 장의사의 시체 문화유산 탐방기 시체 시리즈
케이틀린 도티 지음, 임희근 옮김 / 반비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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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 스님의 『아름다운 마무리』를 이렇게 정의한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내려놓음이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비움이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삶의 본질인 놀이를 회복하는 것.

아름다운 마무리는 지금이 바로 그때임을 안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나를 얽어매고 있는 구속과 생각들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워지는 것.

아름다운 마무리는 스스로 가난과 간소함을 선택한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또한 단순해지는 것.

아름다운 마무리는 살아온 날들에 대해 찬사를 보내는 것.

그리고 아름다운 마무리는 언제든 떠날 채비를 갖춘다.

처음이 있으면 끝이 있고 시작이 있으면 마무리가 있다. 사람은 태어나면 반드시 죽는다. 삶의 시작이 탄생이라면 마지막은 죽음이다. 어떻게 살 것인지에 대한 고민만큼 어떻게 죽을 것인지에 대한 준비를 소홀히 할 수 없다. 마지막이 준비된 사람은 삶을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다. 유언은 살아남은 사람들에게 보내는 메시지일 뿐이다. 유산 분배가 아름다운 마무리일 수도 없다. 육체적 존재로서 자신의 몸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깊이 고민해 본 적이 없다. 단순히 화장이나 수목장 정도를 생각해봤을 뿐이다. 죽음에 대해 많이 생각했고 마무리에 대해서도 유언을 한 지 오래지만 ‘좋은 시체’가 되고 싶다는 생각은 해보지 못했다.

비우고 내려놓고 단순해지고 자유롭고 간소하게 언제든 떠날 채비를 하라는 법정 스님의 말은 죽음이 임박한 사람에게는 필요 없는 충고다. 건강한 사람의 삶의 태도와 방법에 대한 조언에 가깝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병원 장례식장에 도착한 장례지도사는 젊은 여성이었다. 장례 절차와 방법에 빈틈이 없는 일처리 방식이 아니라 마음으로 느껴지는 고인에 대한 예와 진정성 있는 태도가 내게 감동을 주었다. 케이틀린 도티의 『좋은 시체가 되고 싶어』를 읽으면서 그분을 떠올렸다. 장의사로 일하면서 첫 책 『잘해봐야 시체가 되겠지만』만큼 당연한 좋은 시체가 되고 싶다는 말이 깊은 울림을 준다. 도대체 좋은 시체란 무엇인가.

미국 콜로라도주 크레스톤에서는 야외에서 장작더미로 시체를 태운다. 열린 하늘 아래 주변을 환하게 혹은 뜨겁게 달아오르게 하며 타오르는 상상을 했다. 얼마나 아름답고 숭고한 마무리인가. 좋은 시체가 되고 싶다는 바람은 전망 좋은 묘지 터, 후손들이 잘 먹고 잘 살 수 있는 명당자리, 화려하고 커다란 조형물로 치장된 산소에 묻히는 일이 아니다. 저자는 인도네시아 남술라웨시 토라자, 멕시코 미초아칸, 노스캘로라이나주 컬로위, 스페인 바로셀로나, 일본 도쿄, 볼리비아 라파스, 캘리포이나주 조슈아트리의 장례식을 찾아간다. “죽음이여, 그대는 우리를 이긴 줄 알지만 우리는 장작을 불태우며 노래 부른다.”라는 인도 영가가 울려 퍼지는 장례식장에서 지면, 영혼은 자유로움을 느끼는 저자의 모습이 그려진다.

한 인간의 삶을 마무리하는 산 자들의 의식은 엄숙하고 숭고하지만 그것을 무엇을 위해 어떤 방식으로 진행되는지는 공동체의 전통과 문화 의식을 대변한다. 매장, 화장, 자연장 등 어떤 방식이든 시체는 자연으로 돌아간다. 육체는 분해되고 다시 우주의 순환고리 안에 편입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놀랄 만큼 짧은 시간 안에, 미국의 장의업은 지구상 다른 어떤 나라의 장의업보다 더 값비싸고 더 산업적이며 더 관료적으로 변했다. 우리가 가장 잘한다고 말할 수 있는 일이 하나 있다면, 그건 슬픔에 잠긴 유가족을 고인으로부터 떨어뜨려놓는 일일 것이다.” 한국의 장의업도 별반 다르지 않다. 애도와 작별의식보다는 장례 물품의 등급과 가격에 신경을 곤두세운다. 고인의 마지막에 최선을 다하려는 유가족의 슬픔이 클수록 장의업은 번창한다. 미국 장의사가 비판하는 장례 문화를 인정하더라도 대한민국의 전통과 문화를 일시에 뒤바꿀 수 없다. 다만 좋은 시체가 되려는 준비와 노력은 황망한 죽음 앞에서 허둥대는 유가족을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하지 않을까.

“서양의 장의사는 ‘존엄성’이라는 말을 좋아한다. 미국에서 제일 큰 장례업체는 심지어 그 단어로 특허까지 받았다. 존엄성이란 대개 입 다무는 것, 강요된 침착함, 엄격한 형식을 지키는 것을 의미한다.” 지하에 마련된 장례식장에서 육개장을 대접하는 우리 장례 문화는 존엄한가. 망자에 대한 예의와 유가족의 슬픔이 조화를 이루는가. 자연장을 치르는 조슈아트리에서 저자는 “나는 인생의 30년을 짐승의 살을 먹으며 보냈다. 그런데 내가 죽고 나서 그 짐승들이 반대로 나를 먹는 것은 왜 안 된다는 말인가? 나도 하나의 짐승 아닌가?”라고 묻는다. 살아 있을 때 고민하고 준비하지 않으면 자신의 몸은 좋은 시체가 아니라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부담이 될 수 있다. 그것은 죽음 그 자체와 별개의 문제가 아닌가. “죽음을 둘러싼 우리의 두려움, 수치심, 슬픔을 소독할 수 있도록 햇빛 속으로 끌고 나오는 어려운 작업은 이제 막 시작되었다.” 이제 우리 모두 어려운 작업을 시작할 때가 아닐까. 멀지 않은 일이다. 미리 준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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