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폭력의 힘 - 윤리학-정치학 잇기
주디스 버틀러 지음, 김정아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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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 아렌트는 『공화국의 위기』에서 권력power과 폭력violence이 확실히 구분된다고 보았다. 그러나 현실에서 이 둘은 일심동체다. 가정 내 부모, 자식 간의 위계질서, 군대와 직장 내 직급과 직책, 국가 기관에 의한 공권력 등 권력은 폭력을 내포한다. 이때 폭력은 물리적 힘뿐만 아니라 언어 폭력, 시선 폭력, 냉소와 무관심, 심리적 억압, 가스라이팅 등 종류를 헤아릴 수 없이 다양한 형태를 포함한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일상적 권력은 ‘노오력’에 의한 당연한 권리로 둔갑하기 십상이다. 견제받지 않으려는 검찰, 감시받지 않는 언론, 국민을 의식하지 않는 국회에 이르기까지 민주국가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형태의 갑질과 권력 남용은 일상이 되었으며 그것이 폭력인 줄도 모르고 매일 폭행당하며 사는 시민들의 무감각은 놀랄 만하다.

미국의 철학자이자 젠더 이론가인 주디스 버틀러에게 폭력은 불평등, 능력주의, 혐오와 닿아 있다. 오랫동안 동성애와 여성주의 운동 최전선에서 혁신적이고 전복적인 사유와 실천으로 신뢰를 쌓아온 저자의 ‘비폭력’은 일관성 유지하며 새로운 정치철학과 윤리학에 화두를 던진다. 주디스 버틀러는 “비폭력은 바로 폭력장 안에서 윤리적 사안이 된다.”라고 주장한다. 비폭력은 평화주의자의 개념적 선언도 아니고 일상에서 말하는 범법행위를 넘어 윤리적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는 문제다. 비폭력의 범위와 한계는 개인과 사회마다 기준이 달라 여전히 논쟁 중이다. 하지만 저자는 “폭력을 가하는 것이 극히 정당해 보이고 당연해 보이는 바로 그 순간에 (의무적 선택지까지는 아니라고 해도) 가능한 선택지로 주어지는 저항적 실천이 비폭력”이라고 말한다. 말하자면 비폭력은 수동적, 소극적 대응 방식이 아니라 매우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삶의 태도라는 의미다.

두 가지 측면에서 비폭력을 정의하면서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전투적 평화주의”라고 불렀던 그것을 공격적 비폭력으로 재검토해볼 수 있으리라고 주장한다. 갈등과 논쟁을 외면하고 좋은 게 좋은 거니 덮고 넘어가자는 태도와는 전혀 다르다. 전투적 평화주의를 ‘공격적 비폭력’이라는 표현하는 지점에서 잠시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들리는 두 단어의 조합이야말로 소리 없는 아우성으로 그치지 않겠다는 선언이다. 그간 인류가 걸어온 야만의 세월은 특정 시대의 정치 형태와 전통과 문화 때문이 아니다. 지금, 오늘을 사는 나와 우리가 목도하는 현실은 인간의 내면에 숨은 이기적 욕망과 자본주의에 물든 탐욕적 태도가 그 자체로 폭력이다. 노력한 만큼 벌고, 능력이 닿는 한 많이 가질 수 있는 자유를 주장하는 사람들의 논리에 동조하는 못 가진 사람들의 박수 소리가 요란하다. 평등의 가치는 침묵을 지키고 오로지 정의롭지 못한 자유, 그들만의 자유, 교묘하게 포장된 자유가 공정과 정의라는 이름으로 세상을 뒤덮고 있다.

주디스 버틀러는 평등에 참여하지 않는 비폭력은 무의미하다고 말한다. 다른 누군가의 생명을 지킨다는 고귀함, 전쟁을 반대한다는 평화주의에 머무는 추상적 비폭력은 현실 개선의 구체적 실천 방안을 내놓지 못한다. 비폭력의 힘은 저항과 실천에서 나온다고 믿는다. “페미니즘 투쟁과 트랜스젠더 투쟁은 서로 이어져야 한다. 여성 살해를 성테러sexual terror의 일환으로 이해한다면, 이 두 투쟁은 서로 이어져 있을 뿐 아니라, 이 두 투쟁과 퀴어 투쟁, 동성애 혐오와 싸우는 모든 사람들의 투쟁, 지나치게 높은 비율로 폭력과 방치에 노출되어 있는 비非백인들의 투쟁도 모두 이어져 있다.” 폭력이 사회적 불평등의 악화 요인이라는 데 동의한다면 불평등한 위치에 놓인 노동자, 소수자의 권리 강화, 폭력에 대한 강력한 처벌 등 제도적 장치를 주저하는 이유가 뭘까. 주권자는 누구의 편에서 어떤 정책에 동의하며 누구의 말에 귀 기울이며 현실 개선 노력에 의지를 보이는가. 안타까운 일이지만 또,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위로하며 적응하며 사는 게 우리들의 자화상이다.

“비폭력을 힘과 연결한다는 것, 비폭력 실천을 폭력이 아닌 힘(저항과 생존의 연대 협력에서 표면화되는 힘)과 연결한다는 것은, 비폭력이 약하고 무익한 수동성이라는 관점을 거부한다는 것이다. 거부하는 것은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과는 다르다.” 실제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공격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폭력이 정당화되는 순간은 언제일까. 왼뺨을 맞으면 오른뺨을 내줘야 할까. 일상의 폭력들, 어쩌면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순응하며 살아가는 폭력적 현실 앞에서 그래도 ‘희망’은 있다는 말로 눙치면 그만일까. 누군가는 점진적인 변화와 노력을, 누군가는 근본적인 혁명과 개선을 이야기하지만 역사를 되돌리고 파괴적이고 폭력적인 방법으로 자기주장에 힘을 실어 이익을 챙기는 사람들도 있다. 누군가 무슨 말을 하든 판단과 선택은 각자의 몫이지만 선거철에 철새들에게 현혹되지 말고 숨 쉬듯 비판적 관점을 유지해야 한다. 언제나 위험과 폭력은 내가 선이요, 진리라는 착각에서 비롯되는 법이다. 성찰하지 않고 겸손함을 모르는 위선은 그 자체로 타인을 향한 폭력이다.

비폭력의 힘을 주장하는 주디스 버틀러의 깊고 넓은 사유를 따라가다 보니 자연스럽게 아니 어쩌면 매번 내 삶의 태도와 우리가 사는 현실을 찬찬히 돌아보게 된다. 조금 더 멀리 내다보며 다양한 형태의 폭력에 대해 돌아보는 시간이 필요하다. 의식하지 못하는 무지의 폭력이야말로 가장 경계해야 할 태도라고 생각한다. 비폭력은 공격적으로 실천해야 하는 윤리적 삶의 태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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