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몽의 변증법 - 철학적 단상 우리 시대의 고전 12
테오도르 아도르노 외 지음, 김유동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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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적 사유라는 가장 포괄적인 의미에서 계몽은 예로부터 인간에게서 공포를 몰아내고 인간을 주인으로 세운다는 목표를 추구해왔다. - 21쪽

과학기술과 이성의 발달은 인류의 문명을 한 단계 도약시켰다. 산업혁명 이후 대량생산 체제를 갖추고 다양한 문화 예술이 장밋빛 미래를 예견했다. 이성의 발달과 르네상스를 지난 계몽주의는 벨 에포크 시대로 접어드는 통로였다. 그러나 1914년 1차 세계대전의 총성과 함께 20세기는 야만의 시절로 회귀한다. 폭력과 갈등은 민족주의와 파시즘으로 꽃을 피운다. 그 절정에 아우슈비츠가 놓여 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예술가들은 다다를 거쳐 기존의 모든 질서와 체계를 부정하는 초현실주의로 나아갔다. 프랑크푸르트 ‘사회연구소’에서 교수 활동이 금지되자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는 1933년 미국으로 망명한다. 그들에게 미국은 천국이 아니라 문화적 충격이었다. 상류계급 시민이 누린 지적, 문화적 소양이 오히려 유럽 사회를 새롭게 인식하는 계기가 됐을까. 이 책은 두 번의 세계대전을 치른 인류의 암울한 반성문이다. 문명발달의 과정은 진보의 역사다. 역사는 한발씩 앞으로 나아가며 야만의 세월에서 벗어났다는 믿음은 원자폭탄과 함께 터져버렸다.

어디에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아니 인간의 역사는 야만의 세월을 넘어설 수 있는가. 과학기술의 발달이나 생활 수준의 향상과 무관하게 인류의 역사는 인간의 폭력성, 야만성을 증명해왔다. 숱한 제노사이드, 다양한 방식의 차별, 전쟁과 살육의 과정은 희망 따위를 언급할 수 없다. 아도르노의 말대로 아우슈비츠 이후에 시를 쓴다는 것은 야만적이다. 낭만적 사랑과 희망찬 미래는 개에게나 던져줘야 하는 게 아닐까.

이 책은 “왜 인류는 진정한 인간적 상태에 들어서기보다 새로운 종류의 야만 상태에 빠졌는가”를 밝히기 위한 총체적, 역사적 해석을 시도한다. 그리스의 고전 오디세우스를 소환하고 사드의 소설에서 줄리엣을 증인으로 내세운다. 18세기 이후 서양을 지배한 이성과 합리주의는 스스로 무너졌다. 문명은 실패했다. 문명의 진보는 신화와 계몽주의의 변증법적 관계에 불과하다. 고대 신화에 등장하는 신들은 자연을 제압하고 인간을 계몽한다. 재난의 공포, 운명의 선택 앞에 인간은 언제나 신에게서 답을 얻었다. 신화에서 벗어났다고 믿는 오만한 인간의 모습이 두 번의 세계대전을 통해 드러난 게 아닐까. 인간이 스스로 신화를 창조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비이성적 세계로 인류를 퇴행시켰다. 게르만족이 앞세운 민족적 우월성이 바로 그것이다. 창조된 신화로 계몽된 사람들의 집단적 광기는 히틀러에게 합법적 권력을 부여했다. 스탈린의 강제 수용소도 다르지 않다. 20세기와 함께 신화가 무너진 자리에 계몽주의는 새로운 신화를 창조했고 그 신화는 또다시 인류를 계몽하며 신화를 만들어 갔다.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는 “진리를 역사적 운동에 대치되는 어떤 불변적인 것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진리에 역사성을 부여하는 이론”이 되고자 하는 방법론적 원칙을 내세운다. 계몽의 한계를 드러낸 반유대주의적 요소들을 통해 계몽의 변증법이 인류 문명사를 관통하는 흐름임을 강조한다. “끊임없는 진보가 내리는 저주는 끊임없는 퇴행이다.”라는 문장 앞에 잠시 호흡을 가다듬은 건 냉소적이고 비판적인 문장과 논리를 무너뜨릴 만한 증거가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1947년 미국에서 쓴 이 책의 개정판 서문은 1969년 4월 프랑크푸르트에서 쓰였다. 20여 년이 자났지만 수정에 인색한 이유를 밝히며 여전히 ‘관리되는 세계’로의 발전을 촉진시키기보다는, 자유는 지키고, 전개시키고, 확산시키는 것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스케치와 구상들’은 특정 주제에 집중하지 않고 다양한 현상들에 대한 단상이다. 거대한 하나의 체계를 이루고 불변하는 진리를 주장하거나 이론을 내세우는 이야기보다 반성적 회의주의자들의 이야기에 꽂히는 이유는 지극히 주관적인 취향일 터.

여전히 유효한 통찰 중 하나는 ‘문화 산업’을 대중 기만으로서의 계몽이라고 주장한 부분이다. “대중 매체가 단순히 ‘장사business’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은 아예 한술 더 떠 그들이 고의로 만들어낸 허섭스레기들을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로 사용된다.”라는 주장은 다양한 문화 현상들이 ‘장사’로 통합될 수밖에 없는 이유에 대한 반어적 표현이다. 정신 문화라곤 찾아볼 수 없는 미국 현지의 사정도 저작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겠으나 미국으로 표상되는 자본주의 문화 산업에 대한 황량함이 전통적인 유럽 지식인에 비친 모습은 한심함을 넘어서는 수준이었으리라. 다만 고급문화와 대중문화 사이의 간극이 존재하던 시대에 꼰대같은 소리로 비칠 수 있으나 우리 현실에도 유효한 이야기임에는 틀림없다.

오래전 읽기를 포기했던 책들이 새롭게 읽히고 감동을 주는 문장으로 뒤바뀌곤 한다. 나이와 세월의 장점은 이것만이 아니다. 키케로의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이며 가끔 하늘이 맑고 푸르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사하다. 독서의 목적과 가치를 오해하는 사람들을 가끔 본다. 새로운 도전과 다양한 방법이 나쁘지 않으나 본질에서 멀어질수록 목적이 수단으로 전락한다. 지식과 정보는 도구로 활용돼야 하지만 우선 내 안에서 잘 수용된 후에 겨우 변화 가능성이 있는 게 아닌가. 독서의 변증법 또한 신화와 계몽 사이에서 길을 잃기 십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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