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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왜 끝나나 - 사랑의 부재와 종말의 사회학
에바 일루즈 지음, 김희상 옮김, 김현미 해제 / 돌베개 / 2020년 11월
평점 :
『사랑은 지독한 그러나 너무나 정상적인 혼란』이라는 말은 진실에 얼마나 근접할 수 있을까. 울리히 벡과 엘리자베트 벡 게른샤임이 분석한 근대적 사랑에 대한 고찰은 낭만적 사랑에 대한 환상을 여지없이 깨뜨린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이유를 떠올려보자. 세속적 사랑과 순수한 사랑이라는 따로 있다고 믿고 싶은 사람에게 에바 일루즈가 묻는다. 사랑은 왜 끝나느냐고. 근대 이후 자유연애가 가능해진 인류에게 성과 사랑은 자본주의와 현대 문화를 통해 변형되고 왜곡된 지 오래다.
사랑은 왜 아픈가(2011), 사랑은 왜 불안한가(2013, 원제: 하드코어 로맨스)에 이어 사랑은 왜 끝나나(2018)로 이어지는 에바 일루즈의 고민은 아직 끝나지 않은 듯하다. 인류 사회는 한순간도 멈추지 않고 끝없이 계속해서 다른 형태의 사랑을 창조하기 때문이다. 사회학, 커뮤니케이션, 문화이론을 고루 연구했지만 저자의 논거는 대체로 사회학 이론에 집중되어 있다. 앞서 언급한 울리히 벡, 악셀 호네트, 앤서니 기든스 등 현대사회를 분석하는데 이론적 토대를 마련한 저작을 적용하며 ‘사랑’의 본질을 탐구한다.
전근대 사회에서 구애는 확정적 선언이었다. 썸을 타고 탐색하고 망설이는 과정을 거쳐 사랑을 고백하는 현대식 사랑과 정반대였다. 사랑을 흔히 ‘선택’의 문제라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미모와 능력으로 대표되는 우월적 지위가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현대사회에서 사랑은 오히려 거래의 대상이 된 지 오래다. 마음이 움직이고 가슴이 두근거리는 일련의 과정을 부정하는 게 아니라 만남과 구애와 고백의 과정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갈등과 망설임에 도사리고 있는 선택의 기준에 대한 현상들. 에바 일루즈는 ‘부정적 선택’이라는 개념을 통해 배제의 논리로 ‘선택하지 않음’의 사랑을 시작한다.
캐주얼 섹스의 일상화, 부정적 사회성이 초래한 혼란스러운 섹스는 자본주의와 결합한 몸의 가치를 돌아보게 한다. 존재론적 당혹감은 평가 기준의 변화로 이어지고 주체의 혼란스런 지위를 경험하게 한다. “전근대의 구애는 감정으로 시작해 섹스로 끝났다. 그리고 전근대의 섹스는 죄책감과 불안감으로 불러일으킬 정도로 조심스러웠다. 그러나 현재의 관계는 (쾌락적) 섹스로 시작해 어디서부터 어떻게 감정을 가꿔야 할지 몰라 전전긍긍하며 관계를 두렵게만 여기는 불확실성과 씨름한다. 몸은 감정을 표현하는 무대로 기능해왔다(“좋은 관계는 좋은 섹스로 표현된다”는 상투적 표현을 보라). 그러나 감정은 성적 상호작용과는 관계없는 것이 되었다.”라는 해석이 가능한 이유는 무한한 자유와 혁명적 남녀관계의 변화 때문이다. 현대사회에서 사랑과 섹스의 문제가 어떻게 감정과 관계에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 저자는 구체적 사례를 인용한다. 다양한 사람들의 대화와 인터뷰를 직접 인용하며 그들이 겪는 ‘혼란’, 즉 사랑이 왜 끝나는지에 대해 살피는 방식이다.
실제 우리에겐 무한한 자유가 주어질 수 없다. 누구나 평등할 수 없듯 사랑 또한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상황에 따른다. 일반화할 수 없는 현대인의 사랑이 왜 끝나는지 궁금하다면 진지하게 시간을 들여 이 책을 탐독할 만하다. 변덕스러운 감정, 신뢰와 불확실성에 처한 연인들은 부정적 관계로서 헤어짐을 택한다. 사랑의 끝은 어떻게 찾아오며 이별의 서사구조는 어떠한가. 현대사회에서 섹슈얼리티는 사랑과 이별에 어떻게 작동하는가. 전 세계 곳곳에서 매일 쏟아지는 드라마와 영화를 보며 감정을 이입하고 자기 경험을 돌아봐도 고민은 쉽게 해결되지 않는다. 물론, 사랑이 끝나는 이유를 책으로 배울 수는 없다. 다만, “‘사랑의 끝남’ 과정 대부분에서 주체가 자신의 가치를 확보하려 홀로 투쟁하도록 버려진 것은 자본주의 사회 때문이라는 논제로 귀결된다. 가치는 서로 다른 네 가지 무대에서 성립된다. 바로 섹슈얼리티화, 소비 대상과 소비 실천, 관계로부터 탈출함으로써 자율성을 긍정하는 능력, 감정 존재론이다. 그리고 가치는 가정 내에서 사랑이 식어가는 그 방식에 의해 끊임없이 의문에 부쳐진다. 그러나 또한 관계를 시작하고 떠나는 행위는 강제적으로, 끊임없이 일어난다. 이로써 자존감은 갈수록 제로섬 구조에 포획된다. 결국 자아는 섹슈얼리티와 욕망과 소비 정체성과 감정적 확실성을 만족시키기 위해 또 다른 상대에게 깊이 의존할 수밖에 없다. 친밀성과 결혼은 서로 상대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으로 체험된다. 그래서 얻어지는 놀라운 결과는 이별이나 이혼이나 다시금 자유를 회복하는 통로가 된다는 점이다. 대다수 인생에서 가장 아픈 경험 가운데 하나인 이별 또는 이혼은 결국 자유를 되찾을 탈출구가 된다.” 주체적 사랑, 섹슈얼리티, 욕망, 소비 정체성, 감정적 확실성은 사랑이 끝나는 이유이며 자유를 확보하려는 몸부림이다. 동양의 가부장적 문화와 전통적 가족 관계에 익숙한 우리에겐 먼 이야기일까. 아니다, 그렇지 않다. 사랑은 사랑일 뿐 언젠가 끝나지 않겠는가.
사랑의 본질과 의미에 대한 무관심은 낭만적 사랑과 환상에 시달리게 한다. 그 또한 주체적 사랑의 시작이며 일련의 과정을 거쳐 이별이 아닌 사랑의 끝에 도달하게 된다. 영원한 사랑을 꿈꾸는 사람들이라고 해서 이 책의 독자로 적합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자본주의와 현대사회가 사랑이라는 감정을 어떻게 변형시키고 있는지 수십 년간 연구해 온 에바 일루즈의 노력에 값하는 깊이와 통찰로 가득한 책이다. 세심하게 고민한 흔적이 역력한 문장들은 단순히 현상을 나열하고 분석을 보태는 정도의 수고만 들인 책과 비교된다. 사랑은 왜 끝나나, 라는 질문에 한 마디로 답할 수는 없어도 자신의 감정과 욕망이 왜 변하는지 한 번쯤 돌아볼 수 있다는 점에서 충분히 의미 있는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