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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에 대하여 - 왜 사과는 생각보다 힘들고 복잡하고 어려운가
아론 라자르 지음, 윤창현 옮김 / 바다출판사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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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입 베어 문 자국이 선명한 사과. 나의 첫 스마트폰인 아이폰 3 애플apple 로고를 한참 들여다본 기억이 난다. 분명 소비자에게 사과apology를 떠오르게 할 리 만무하나 한국어의 동음이의어는 기묘하게도 시원하고 단맛이 나는 과일과 미안하다는 의미의 사과는 같은 소리를 낸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고 하지만, 사과는 죽음을 면하게 할 수도 있다. 칭찬은 쉽고 사과는 어렵다. 칭찬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사과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왜 그럴까.
인간이 느끼는 자연스런 정서와 욕망과 행동에 대한 연구 결과는 늘 흥미를 끈다. 근본적인 원인을 알게 되면 타인과 세상을 조금 다르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칭찬에 인색한 사람뿐만 아니라 사과할 줄 모르는 사람의 내면을 들여다보자. 상황과 관계에 따라 다르겠으나 칭찬을 한 사람에게는 대체로 긍정적 효과가 나타난다. 손해보다 이익이 많다. 의외로 가성비가 뛰어난 처세술이다. 이에 비해 사과는 대체로 잘해야 본전이다. 오히려 부정적 효과가 나타나고 상황과 관계가 악화되기도 한다. 최근에 불거진 ‘개 사과’ 논란이 대표적인 예다. 개인이 개인에게, 개인이 집단에게, 집단이 집단에게 하는 사과의 내용과 형식에 따라 후폭풍이 거세지고 반작용이 일어나기도 한다. 하지 않으니만 못한 사과로 관계가 단절되거나 상황을 악화시키기도 한다. 아우슈비츠에 대한 독일의 사과, 종군 성노예에 대한 일본의 사과 등 국가 간의 사과는 여전히 진행형인 국제 문제다. 이렇게 중요한데도 불구하고 사과는 사람들에게 큰 관심사가 아니다. 오히려 칭찬과 처세에 관심이 많다. 그래서 『사과에 대하여』 누구에게나 한 번쯤 일독을 권하고 싶은 주제다.
사회심리학자이자 정신과 의사인 아론 라자르는 우선 사과의 가치에 주목한다. 왜 우리가 사는 시대에 사과가 더욱 중요해졌는지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한다. 계급과 계층, 나이와 관계, 성별과 친소에 따라 사과는 전혀 다른 양상이다. 시대와 문화에 따라 사과하는 방법과 의미도 달라진다. 아론 라자르는 “인간관계에서 가장 심오한 행위는 사과를 주고받는 것이다. 사과는 피해자의 모욕감과 원한을 해소하고, 복수에 대한 욕구를 제거하며, 상한 감정의 용서를 이끈다.”라는 말로 사과의 가치를 정의한다. 상식적 사과의 기본은 진정성이다. 거짓 사과는 오히려 부작용을 부른다. 그러면 사과는 어떻게 해야 할까. 사과는 크게 네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①잘못에 대한 인정 ②해명 ③후회, 수치심, 겸허함, 진심 등을 포함한 태도와 행동 표현 ④보상이다. 개별 사과에 따라 사과 과정의 부분별 중요성, 필요성까지도 달라질 수 있다. 첫 번째 단계가 가장 중요하다. 인정할 수 있는 용기야말로 사과의 기본이고 시작이다. 무엇을 잘못했는지, 어떤 실수를 했는지 인정하지 않고 모호한 말로 회피하거나 조건을 붙이거나 변명으로 시작되는 사과를 요즘 뉴스에서 자주 접한다. 자초지종을 해명하고 마음을 담은 태도와 행동을 보이며 그에 합당한 보상과 책임이 뒤따를 때 사과는 마무리된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사과가 가진 치유의 힘을 ‘1. 손상된 자존심과 명예 회복 2. 보편적 가치를 공유한다는 믿음 3. 피해자가 잘못 없다는 확인 4. 미래의 안전에 대한 확신 5. 가해자의 심적 고통을 목격 6. 손해에 대한 합당한 보상 7. 상처를 표현할 의미 있는 대화’라고 정리한다. 학문적 이론과 실험결과로 증명하는 게 아니라 숱한 사례를 통해 관찰하고 분석한 결과다.
잘못에 대한 인정을 위해 필요한 네 가지 요소는 ‘1. 사과를 받아야 하는 피해자, 피해에 책임이 있는 가해자 또는 관련자들을 정확히 판별하는 것 2. 잘못된 행동을 소상히 인정하는 것 3. 이러한 행동이 피해자(들)에게 끼친 영향을 인지하는 것 4. 피해가 당사자 간의 사회적 혹은 도덕적 계약을 침해했음을 확인하는 것’이라고 한다. 첫 번째 단추가 잘 끼워지면 후회 → 해명 → 보상으로 이어지는 단계로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특히 “공적 사과에서 잘못의 세부 사항을 따지는 일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사과하는 쪽이나 사과 받는 쪽이 다수, 때로는 몇백만 명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잘못이 세세하게 적시되지 않을 경우, 훗날 상충된 해석으로 인해 파국에 치닫게 될지도 모른다. 이런 사과는 문서 형태로 성문화되어 당사자 모두의 역사에 편입되기 때문에, 가해자는 모호함 없게, 상호 이해된 바가 추후 정정될 여지가 없게끔 처음부터 ‘제대로’ 해야 한다.”라는 지적에 공감했다. 개인적인 사과는 관계와 상황에 따라 ‘진심’이 통할 수도 있고 거절될 수도 있으나 공적 사과는 그 형식과 방법에 따라 무거운 결과로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정확하게 사과하는 방법, 우리가 사과하는 이유와 사과하지 않는 이유 그리고 사과하는 타이밍에 대해서도 사례 중심으로 서술되어 있다. 뭔 사과 이리 복잡하냐는 말이 나올 정도로 세세하게 짚는다. 우리는 사과의 교과서를 공부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제대로 된 사과가 무엇인지 알 필요는 있지 않을까. 일상에서 부딪치는 서로 다른 생각들, 이성의 영역과 감정의 충돌, 숱한 인간관계에서 벌어지는 갈등이 어쩌면 ‘사과’에 대한 잘못된 인식 때문인지도 모른다. 사과를 개에게나 줘버리는 정도로 생각하다가 스스로 개가 될 수도 있다. 각자의 성향과 기질에 따라 조금씩 다르겠으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건 사과할 수 있는 ‘용기’가 아닐까 싶다. 거짓말을 마음껏 할 수 있는 ‘만우절’도 있는데 그 많은 ‘~절’과 ‘~데이’ 중에 왜 ‘사과절’이나 ‘미안하데이’는 없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