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터 카멘친트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53
헤르만 헤세 지음, 박종서 옮김 / 문예출판사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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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신화가 있었다.

헤르만 헤세의 첫 번째 소설 『페터 카멘친트』의 첫 문장이다. 태초에 빛이 있듯 모든 사람은 자기만의 신화를 갖고 있다. 『데미안』과 『수레바퀴 아래서』를 읽으며 싱클레어에 몰입한 사춘기, 헤르만 헤세는 내게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를 권했다. 신열에 들떠 골드문트가 되어 불면의 밤을 보내기 시작했고 질풍노도의 시기를 통과했다. 스무 살 무렵 헤세의 마지막 소설『유리알 유희』와 함께 오랫동안 헤세를 잊고 지냈다. 『헤르만 헤세의 독서의 기술』을 읽은 적이 있으나 헤세는 여전히 내 삶의 첫 신화에 온기를 불어넣은 작가다. 이제, 그의 첫 소설을 읽으며 아련한 추억들이 떠올랐으며 열병을 앓던 사춘기의 느낌이 되살아 났다. 그땐, 그랬었지.

가족의 울타리에서 벗어나 길을 떠나고 친구의 죽음과 실연의 상처로 방황하다 인간에 대한 존재론적 사랑과 연민을 통해 성숙한 인간으로 거듭나는 페터 카멘친트. 그는 모든 너고 오로지 나다. 체험의 깊이와 넓이가 한 인간을 완성하는 데 어떤 역할을 하는지 한마디로 설명하기 어렵다. 그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신화’에 해당하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사람을 대하는 태도,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 삶의 목적과 가치가 제각각인 건 근대 이후의 일이다. 전통 사회와 달리 개인의 정체성을 찾아 방황하거나 자유의 현기증인 불안을 두통처럼 안고 사는 현대인에게 피터 카멘친트는 과거의 인류 혹은 현재 진행형으로 읽힌다. 우리는 여전히 어머니의 죽음과 이탈리아를 여행하며 성자 프란체스코에 감동하는 유형의 인간에게 몰입할 수 있을까. 그럴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개체 발생은 계통 발생을 반복한다. DNA에 새겨진 자연선택과 성숙의 과정은 진화생물학이나 진화심리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무엇인가가 숨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지극히 개인적 기질과 개체의 고유한 특성에 기인한다. 인간은 비슷한 존재이면서 서로 다른 생명체가 아닌가.

페터 카멘친트는 목공의 딸과 불구자 보피를 통해 인간에 대한 진정한 사랑을 경험하고 그들의 죽음을 수용하며 삶을 긍정한다. 젠알프스의 니미콘에서 태어나 독일 이탈리아 프랑스를 거쳐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는 전형적 원점회귀형 소설이지만 길 떠남은 단순한 소설적 장치가 아니라 한 인간의 도전과 용기를 상징하며 현대인의 불안과 고독에 대한 항변으로 읽힌다. 여전히 치유할 수 없는 외로움에 부들거리는 21세기 네트워크형 인간도 1904년에 발표된 소설의 주인공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이 소설은 전체 8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주요인물과 내용을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유년 시절(어머니) → 첫사랑(뢰지 기르타너) → 만남(리하르트/에르미니아) → 우정(리하르트) → 우울(엘리자베트) → 향수(아버지/나르디니) → 죽음(목공의 딸) → 우정(보피) → 귀향(아버지)’ 내용을 따라가며 주인공의 이동 경로를 따라가 보자. ‘니미콘 → 취리히 → 파리 → 바젤 → 아시시 → 취리히 → 니미콘’으로 순환한다. 타인과의 만남과 교류는 번번이 어긋난다. 사랑은 남의 일이다. 페터의 진심과 그녀의 생각은 다르다. 보피와의 만남으로 인간애를 느끼지만 그 역시 죽음으로 끝이 난다. 인생을 살면서 우리는 끊임없이 만남과 이별을 경험한다. 가족, 친구, 연인 등등. 긴 여행길에 스치는 사람은 기억조차 희미하다. 그들은 각각 다른 의미로 타인을 규정한다. 기억도 다르고 판단도 상이하다.

헤세는 그의 첫 소설에서 전통적인 교양소설Bildungsroman을 문법을 철저히 따른다. 괴테에서 토마스 만의 『마의 산』으로 이어지는 성숙한 인간에 대한 갈망이 헤세로 이어진다. 물질문명이 발달과 과학기술의 눈부신 발전으로 지구인이 하나로 접속해 있으나 우리는 페터 카멘친트가 느낀 대자연의 신비와 경외, 인간에 대한 이해와 겸손으로부터 한 발짝도 더 나아가지 못한 건 아닐까. 싱클레어와 골드문트의 방황과 고민을 여전히 계속하고 있는 건 아닐까. 아무렇지도 않은 척, 세상은 그런 곳이라고 사람은 그런 존재라고 믿으며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며 살아가는 건 아닐까.

꽃 같은 아름다운 시절도

덧없이 사라져버린다.

좋은 일이 있거든 마음껏 즐겨라

내일을 알 수 없는 인생이어니.

- 로렌초 메디치, 13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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