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진 병사 - 어느 독일 병사의 2차 대전 회고록
기 사예르 지음, 서정태 엮음 / 루비박스 / 2007년 5월
평점 :
절판


 

  가장 최근에 본 전쟁에 관한 영화는 <아버지의 깃발>이었다. 최초의 영화는 기억나지 않지만 로버트 드 니로의 <디어 헌터>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플래툰>이나 <풀 메탈 쟈켓>, <씬 레드 라인>, <진주만>에 이르기까지 인상적인 전쟁 영화들은 꽤 많다. 헐리웃 영화의 경우 베트남 전을 소재로 한 영화가 많았고, 당연히 지고 나서 징징거리는 내용이었다. 가해자가 양심의 가책을 받거나 공식화된 영웅담으로 흐르는 뻔한 내용들이다. 그것을 전쟁의 전부라 믿었고 미국은 항상 정의의 편에 서 있다는 정말 위험한 이데올로기를 심어주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것이 바로 헐리웃 전쟁 영화들이었다. 지구상에서 가장 위험하고 불량스런 깡패 국가 미국의 모습이 감추어진 채 포장된 모습과 피상적인 추측만이 가능하던 시절의 친미 성향을 가진 정치와 역사의 관점에서 교육 받는 시절의 이야기이다.


  제2차 세계 대전의 경우는 고민할 필요도 없이 거의 모든 영화가 아우슈비츠에 모아진다. <뮤직 박스>, <쉰들러리스트>, <베를린 천사의 시>를 비롯해 <피아니스트>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변주되어 영화팬은 물론이고 일반인들에게 영화라는 장르가 가진 위력을 마음껏 뽐내며 스크린 앞에서 좌절과 분노 그리고 현실에 대한 안도감과 행복을 만끽하는 역할을 해왔다. 그리고 독일은 여전히 깊이 머리 숙여 반성하고 있고 일본은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다시 우경화로 치닫고 있다. 과거는 망각의 세월 속에 묻혀 가고 현실은 지나간 시간을 돌이킬 틈이 없다. 그러나 현재는 단지 과거의 오래된 미래일 뿐이다.


  루비박스에서 나온 <잊혀진 병사>는 일단 책의 두께가 중량감을 보여준다. 735페이지를 한 권으로 묶어내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전쟁이든 역사든 사람들은 결과와 영웅만을 기억한다. 당연한 얘기지만 ‘그래서 어떻게 됐어’라고 묻는다. 이 책의 저자인 기 사예르는 16세의 나이로 1942년에 전쟁에 뛰어든다. 고등학교 1학년쯤 되는 나이에 군에 자원 입대하는 소년의 생각은 불을 보듯 뻔하다. 조국에 대한 충성심과 전쟁에 대한 환상과 넘치는 에너지의 발산을 위해 뭔가 흥분된 자극이 필요했을 것이다. 프랑스계 독일인 저자는 아버지가 프랑스인이고 어머니가 독일인이다. 이런 중간자적 혈통은 포로가 된 후 결정적으로 석방의 이유가 되기도 한다. 이름없는 무명 용사 기 사예르가 왜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는지 무엇이 그를 전쟁터로 이끌었는지는 이 책에서 확인할 수 없다.


  이 책의 내용은 단순하다. 16세 소년이 전쟁에 투입되어 1945년 포로가 되어 석방될 때까지 러시아와의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동부 전선에서 보낸 3년간의 비망록이다. 그 기록들의 생생함에 입을 다물기 어렵다. 전쟁에 관한 어떤 책보다 더 생생하게 전쟁의 순간들을 포착했고 묘사한다. 뛰어나 글솜씨나 달변이라서가 아니라 단지 그 참혹한 현장에서 보고 들은 내용을 기록했을 뿐이다. 그래서 더욱 피비린내나는 현장을 보여준다. 전쟁에 과한 어떤 분석이나 자료들도 2차 대전의 원인이나 그 결과가 미친 영향을 살펴보는 데 그치고 있다. 몇 명이 죽었거나 다치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어떤 상황이었는가를 객관적으로 살펴보는 일은 지금까지 수없이 반복되어 왔다.


  그러나 이 책처럼 그저 있는 그대로의 현실과 전쟁의 순간들을 다큐멘터리처럼 그려내고 있는 자료는 없을 것이다. 전쟁을 미화하고 있지 않는 것은 물론 어떤 이데올로기나 국가적차원의 이유나 접근, 설명도 필요없다. 단순히 그들이 지키고자 했던 생명의 숭고함과 전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쳤던 그 순간의 기록들을 고스란히 담고 있을 뿐이다. 스스로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느끼며 전쟁을 반대하거나 몸담았던 시간들에 대한 반성과 회의도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단순한 사실의 기록만으로도 이 책의 가치는 충분하다. 그 상세하고 구체적인 상황들과 그 현장에서 인간이 느껴야 했던 모든 것들이 이 책에는 고스란히 담겨 있기 때문이다.


  나도 그랬지만 많은 사람들은 전쟁을 이렇게 이해한다.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의 한계로 치부할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전쟁터에 생각없이 뛰어들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너무 많은 사람들이 손쉽게 전쟁에 대해서 배운다. 그들은 안락한 의자에 앉아 발을 불가에 뻗고 평소처럼 다음 날 일할 준비를 하면서 베르‰窩犬?스탈린그라드 전투를 이해하지 못한 채 그저 읽기만 한다. - P. 366


  장교가 아닌 병사의 입장은 전쟁을 대하는 태도와 마음이 다르다. 죽고 죽이는 현장에서 오로지 살아남아야겠다는 본능이 앞서기도 하고 전우의 죽음으로 울부짖기도 하며 배고픔과 추위를 견뎌내야 한다는 생각 뿐이다. 전쟁은 그들만의 리그로 전개될 뿐이다. 위정자들의 오판과 권력에 대한 욕망, 교묘한 정치적 선동과 대중들의 야합은 인류의 파멸을 재촉할 뿐이다. 여전히, 지금도 전쟁은 계속되고 있지 않은가?


  히틀러나 아이히만 같은 인간에 대한 연구와 대중 심리나 아우슈비츠에 관한 수많은 저작들조차도 ‘전쟁’이 무엇인지 제대로 밝혀주지 못할뿐더러 독자들에게 ‘전쟁’을 제대로 알려주지도 못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책장을 넘기면서 손에 피를 묻히는 기분이었다. 내가 경험했던 군대와 ‘전쟁’에 관한 피상적인 개념들은 하나 둘 사라지고 만다. 인간의 절규와 죽음의 아비규환 그리고 영하 30도의 추위와 굶주림은 살아야겠다는 본능 이외에 그 어떤 욕망으로도 설명되지 않는다. 처절했던 전쟁의 기록들을 긴 호흡으로 훑어보며 무거워진 마음을 추스르기 힘들었다.


그들은 극심한 두려움에 모든 신념이 사라졌고 어떤 일에도 누그러지지 않았다. 그들은 시간이 정지한 것처럼 모든 작전에 앞서 두려움을 느꼈다. 더 이상 생각하지 않기로 한 사람들에게도 자신도 모르게 나무 꼭대기를 비추는 태양빛처럼 공포가 엄습해왔다. - P. 571


독일인은 영웅인가. 미치광이인가? 누가 이런 극단적인 희생정신을 평가할 수 있을까? 침묵 속에 아이들의 마지막 순간을 지켜보았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 P.

619

  

  적들이 몰려올 때 느껴야하는 두려움과 공포는 전쟁 상황이나 피아간의 식별을 넘어 당연한 본능으로 세포 구석구석까지 고스란히 전달된다. 타인의 죽음과 고통을 바라보며 전쟁에 대해 순간순간 떠오르는 상념들을 저자는 날것으로 제시한다. 어떤 화려한 수식이나 포장도 없고 개념화하지 않는다. 그 순간들의 기록과 상념들을 그대로 독자에게 전달된다. 아무것도 아닌 것들의 처절한 육성이 귓가에 어른거린다.

 이 책은 1967년, 그러니까 전쟁이 끝나고도 20여년이 끝난 후에 쓰여진 독일 병사의 비망록이다. 패전국의 어느 병사가 쓴 회고록이 승전국의 전쟁 영웅이 쓴 이야기보다 값진 이유는 독자가 책을 통해 확인할 일이다. 


  스무 살이 되기 전에 지독한 전쟁 경험을 하며 이름 없는 병사가 생각한 것은 다음 몇 줄로 요약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어떤 전쟁의 이론이나 전략가의 충고보다도 독자들의 가슴에 깊이 각인될 수 있을 것이다. 반전평화를 부르짖는 수많은 함성과 요구들보다 처절하고 참혹한 살육의 현장에서 들려오는 이야기들에 한 번 쯤 귀를 기울여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나는 인간성에 호소하지 않고 복수를 원하지도 않는다. 나는 분별력을 잃었기 때문에 지금 이 글을 제외하고는 침묵하며 지냈다. 그리고 외로움 속에서 용서보다 더 강한 것은 없다는 것을 배웠다. - P. 678


  

070608-0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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