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안한 마음
함민복 지음 / 풀그림 / 2006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나무는 가지를 벨 때마다 흔들림이 심해지고
흔들림에 흔들림 가지가 무성해져 나무는 부들부들 몸통을 떤다

나무는 최선을 다해 중심을 잡고 있었구나
가지 하나 이파리 하나하나까지
흔들리지 않으려 흔들렸었구나
흔들려 덜 흔들렸었구나
흔들림의 중심에 나무는 서 있었구나     - 본문 ‘흔들린다’ 중에서

 사람은 자연을 닮고 싶어 하는 게 아니라 자연의 일부일 뿐이다. 산과 물과 바람과 돌은 언제나 스스로 그러한 몸짓으로 거기에 있다. 어떤 모습으로든 본성은 변하지 않지만 달라지는 것은 단지 사람들의 마음일 뿐이다. 이 땅에 존재하는 가장 가난한 시인이라고 설명하면 함민복 시인이 기분 나쁠라나? 강화도 바닷가에서 고욤나무 옆에 땅에 누워 하늘을 덮고 사는 시인의 삶은 비현실적이다. 현실적이라는 말 속에는 물론 ‘자본’이 숨어 있다. 시인의 두 번째 시집 <자본주의의 약속>은 지켜지지 않고 있다. 아니 너무나 정확하게 지켜지고 있다.

 결혼도 하지 않은 채 사십대 중반을 넘기고 있는 가난한 시인은 바닷가에서 무얼 하며 어떻게 살고 있을까? 그의 두 번째 산문집 <미안한 마음>은 읽은 사람을 참 미안하게 만든다. 참 부끄럽게 만든다. 스스로에 대한 반성과 성찰의 기회가 제공되는 책이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거나 내가 그렇게 살지 못하기 때문에 한 번쯤 눈길을 던져보는 생활이 아니다. 자발적이든 아니든 바닷가에서 시인이 살아가는 모습과 이야기들은 경의롭기만하다.

 시인이 아닌 바닷가 사람들의 삶은 고달프고 팍팍하며 시인의 생활은 아름답다고 바라보는 시선은 경계해야 한다. 이 책을 통해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언제 어디서든 고달프고 신산스런 생활의 모습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는 점이다. 다만 그것들을 바라보는 감각이며 여린 감수성이며 따스한 손길이다. 오감이 열린 채 섬세하게 발달한 감각세포로 길어올린 이야기들은 그대로 산문이 시가 된다.

 낭만과 거리가 먼 바다의 높은 파도와 먹을 것 부족하고 편리한 시설과 거리가 먼 시골 생활에 무슨 특별한 것이 있을까. 도시의 문명과 유리된 시인의 삶을 동경하는 것은 불경스럽다. 박제된 수채화가 아니라 시인은 그대로 강화도 바닷가의 일부가 되었기 때문이다. 익선이 형과 석양주를 나눠마시고 배를 타고 고기를 잡으러 나가고 시를 쓰는 생활이 고결한 종교인의 그것과는 거리가 멀다.

 하지만 나는 시인의 생활 속에서, 그의 시선에서 생의 진정성을 본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 왜 사나라는 사치스런 질문 대신 고추밭에 물을 주고 쓰러진 옥수수대가 스스로 일어서는 모습을 지켜보고 고욤나무가 건네는 이야기를 듣는 시인의 생활을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거기에 답이 있다. 자연으로 돌아가라, 무소유의 삶을 살라는 비현실적인 주장이 아니다. 겸손하고 침작하게 지금 현재의 모습을 반성하고 성찰할 수 있는 시간이 마련되어 있다.

 시가 주는 강렬함보다 산문이 주는 잔잔함은 때때로 훨씬 더 긴 여운을 남긴다. 짤막한 산문들을 삽화와 더불어 예쁘게 꾸며낸 출판사의 솜씨는 별로 칭찬하고 싶지 않다. 본능적으로 상업적인 냄새가 난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인이 가진 마음을 흐리게 할 수는 없어 보인다. <우울씨의 일일>에서 보여주었던 가난의 힘과 자본의 힘을 넘어 이제는 고개 숙여 겸손하게 보이는 모습이 <말랑말랑한 힘>을 보여준다.

 이쁜 색시 만나 장가도 가고 아이와 함께 바닷가를 산책하는 즐거움도 누릴 수 있었으면 좋겠다. 혼자 사는 모습이 자발적인 행복의 최전선이 아니라면 말이다. 어쨌든 강화도에 갈 때 마다 떠오르는 시인이 있다는 건 개인적인 감상일 뿐이다. 리얼리스트로서 치열하게 부딪힐 수 있는 여건을 충분히 소유한 시인의 자연 귀의가 아쉽고 안타깝게 여겨지기도 하지만 함민복의 몫이 그것이 아니라면 또 다른 모습과 이야기로 독자들을 설득하는 것도 타당하겠다. 시인의 말대로,

현재란 시간의 섬이다. 세월이 가는 길, 세상 모든 ‘멈춤들’의 정거장인 시간은 현재의 물이다. - P. 41


070129-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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