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 살의 원점
다카노 에쓰코 지음, 전화윤 옮김 / 테오리아 / 2018년 4월
평점 :
절판


아주 오랜만에 마음에 드는 책을 만났다. 빛바랜 사진, 연필로 쓴 낡은 엽서, 바늘이 LP을 긁을 때 나는 지지직 소리 이런 저런 흑백 추억은 누구나 한 두 장쯤 마음속에 지니고 산다. 내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겠지만. 스무 살이 그런 나이가 아닐까. fernweh! 먼 곳에의 그리움. 전혜린이 동경했던 그것처럼 스무 살은 알 수 없는 불안과 고민을 통해 성장한다. 뜨거운 열정과 충동에 휩쓸리며 자기모순에 괴로워하고 불합리한 세상에 돌을 던지는 시기다.

 

우울도 소비되는 세상이다. 외로움도 돈이 된다. 공감과 배려는 특효약이다. 개와 고양이가 인간이 줄 수 있는 위로와 행복을 대체한 지 오래다. 인간이 인간에게 주는 상처와 고통을 감안하면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음이 있다. 해시태그를 달고 하트를 눌러 공감을 표시하며 온라인에서 받는 위로는 관련 상품 구매로 이어지고 책은 베스트셀러에 오른다. 디지털 시대의 아이러니다.

 

아날로그 시대의 스무 살, 다카노 에쓰코는 시대의 우울을 견뎌야 했다. 내적 갈등과 자기 모순에 괴로워하고 새로운 세상을 어떻게 받아들여야할지 모르는 스무 살이다. 수없이 흔들리고 시행착오를 겪는 동안 아주 조금씩 배워갈 수 있을까. 스무 살의 원점의 시작 부분이다.

 

스무 살이라는 나이에 비해 내가 너무 미숙한지도 모른다. 세상 물정 모르는 바보인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세상 물정을 안다는 말에는 체제에 순응하며 뻔뻔하게 살아간다는 의미가 어느 한쪽에 존재한다. ‘미숙하다, 바보다, 세상 물정을 모른다.’ 나는 자주 이렇게 말하곤 한다. 하지만 에쓰코, 그 무엇도 비하하지 마. 너 자신을 아껴야 해. 너는 서투르지만 무슨 일든 성실하고 진지하게 하잖아. 다른 사람을 사랑스럽게 여기고 아끼는 마음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잖아. 물론 네게도 단점은 있어. 자기 주장이 강하고, 아니 그것보다는 제멋대로지. 다른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려 하지 않고, 스스로를 잘 다스리지도 못하고, 자존심도 아주 강하고, 부끄러움을 많이 타지.

나는 길들여지는 인간이 아니라 창조하는 인간이 되고 싶다. ‘다카노 에쓰코가 되고 싶다. TV, 신문, 주간지, 잡지, 모든 것이 나를 길들이려 한다. 나는 내 의지로 결정한 일을 할 것이고, 모든 것에 부딪혀 있는 힘껏 버둥거리고, 노래를 부르고, 못 그리는 그림도 그리고, 웃고 울고 슬퍼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13

 

미숙하고 불합리한 자신을 발견하고, 모순된 세상에 눈을 뜨는 성장통을 겪지 않으면 스무 살은 무슨 의미일까. 학점과 스펙, 취업과 재테크가 20대를 점령한 세상은 끔찍하지 않은가. 밥벌이의 숭고함을 깨다는 일도 중요하지만 인간 존재의 근원,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고민하지 않는 스무 살은 남은 인생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 걸까. 에쓰코는 미숙하고 불안하고 자존심이 강하지만 부끄러움이 많은 스무 살이다. 이 책은 그 아름답고 숭고한 시간에 대한 기록이다.

 

196912일에 시작된 일기는 622일에 끝난다. 이틀 후 기차에 뛰어든 다카노 에쓰코. 30년 전에 살았던 스무 살 여대생의 6개월치 일기를 훔쳐보는 동안 만감이 교차했다. 어린 딸을 남기고 자살로 생을 마감한 전혜린의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를 읽고 잠 못 들던 사춘기의 밤이 먼저 떠올랐다. 창가에 기대 슈바빙의 파란 새벽이 밝아오는 장면을 따라하려고 시험 마지막 날 처음 밤을 새우고 새벽을 맞은 기억도 생생하다. 다카노 에쓰코의 스무 살은 자신의 내면과 외부 세계에 대한 갈등으로 가득하다. 나카무라와 스즈키에 대한 관심과 사랑보다 전공투(전국학생공동투쟁회의)’에 대한 고민이 스무 살 여대생을 흔든다. 시대정신은 한 개인의 내면에 깊은 상처를 내고 삶과 죽음의 경계를 가르기도 하는 법이다.

 

일기 형식으로 쓴 에세이가 아니라 자신의 일기장에 사유리라는 이름을 지어 줄 정도록 각별한 일기장은 다카노 에쓰코 사후 그대로 출간된다. 60대 후반 일본의 학생 운동 상황을 객관적 자료로 살펴보는 일은 스무 살 여대생의 일기와 비교할 수 없다. 마치 6.25 전쟁을 기록으로 검토하는 것과 하근찬의 수난이대나 윤흥길의 장마를 비교할 수 없는 것처럼. 하지만 이 책을 단순히 시대 상황을 이해하기 위한 서브 자료로 이해하는 것은 올바른 독법이 아니다.

 

이 책은 감수성 예민한 스무 살 여대생의 일기로 읽으면 충분하다. ‘인간은 불합리한 존재다. 여러 가지 모순을 가지고 있다.’ ‘청춘을 잃으면 인간은 죽는다. 질질 끌려가며 타성에 젖어 살 필요는 없다. 서른이 되면 자살을 고민해봐야겠어.’, ‘자기창조를 완성할 때까지 나는 죽지 않겠습니다.’, ‘얻어맞으면 한 대 때릴 수 있을 정도로 자기애를 가질 것.’과 같은 내적 고백과 다짐이 가득하다. 우리가 통과했을 그 여리고 순수했던 시절에 대한 그리움이 날 것 그대로 배어나오는 문장들이다.

 

죽기 직전 6개월 동안 다카노 에쓰코를 괴롭힌 건 현실이다. 남자, 대학, 사회, 권력, 자본……. 부조리한 세상에 차츰 눈떠 가며 사람들은 흔히 현실과 타협을 택한다. 성공을 위해 달리고 더 많이 벌기 위해 노력한다. 자본주의가 설치한 욕망의 덫을 피하지 못하고 더 많은 권력과 더 높은 지위를 열망한다. 그리고 그럴싸하게 포장하는 법을 배운다. 다카노 에쓰코도 이기적인 욕망과 세상의 환멸에 혐오감을 느낀다. 섬세한 감정의 떨림과 내적 갈등의 원인은 전공투와 민청의 갈등도, 나카무라와 스즈키 사이의 고민도, 언니와 가족과의 싸움도 아닐지 모른다.

 

“‘혼자라는 것’, ‘미숙하다는 것’, 이것이 내 스무 살의 원점이다.”(26)라는 고백처럼 인생은 절대 고독에서 벗어날 수 없고 영원히 진리를 찾을 수 없다는 사실을 일찍 깨달았는지도 모른다. 스무 살이기 때문이 아니라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인간 존재의 한계를 절감한 것이 아닐까. 1949년에 태어나 1969년까지 꼭 스무 해를 살았던 일본의 대학생 다카노 에쓰코은 이 책으로 여전히 숨쉬고 있다.

 

그녀가 남긴 아픔과 고통이 여전히 공감을 얻는 이유는 스무 살의 보편성때문이 아닐까. 알에서 껍질을 깨고 나오는 힘겨운 과정을 겪었던 시기는 시대를 막론하고 유사한 경험이다. 아프고 고통스럽지만 충분히 고민하고 자기 정체성을 찾지 못하면 생각한 대로 사는 게 아니라 사는대로 생각하게 된다. 인생의 주인이 아니라 노예로 살게 된다. 부디 이 책이 보다 많은 20대에게 읽히기를. 자기 삶의 주인이 되기 위한 밑거름이 되기를. 근본적인 문제를 고민하고 고통의 근원을 끝까지 사유하는 도구가 되기를. 50년 전 스무 살이 오늘 우리에게 전하는 당부일 것이다.

 


인간은 불합리한 존재다.
여러 가지 모순을 가지고 있다.
인간에게는 육체가 있다.
육체는 합리성만으로 결론지을 수 없다.
육체를 떠나 인간은 존재하지 않고, 정신도 존재하지 않는다.
육체는 생명이 있다. - 19쪽

‘혼자라는 것’, ‘미숙하다는 것’, 이것이 내 스무 살의 원점이다. - 26쪽

태양이 동쪽에서 떠올라 서쪽으로 진는 것은 가짜 현실이고, 지구가 서에서 동으로 자전하는 것이 진짜 현실이다. 그렇게 인식할 때 비로소 주체성이 생기고 살아갈 현실이 생긴다. - 63쪽

청춘을 잃으면 인간은 죽는다. 질질 끌려가며 타성에 젖어 살 필요는 없다. 서른이 되면 자살을 고민해봐야겠어. 그런데 앞으로 십 년 동안 살아봐야 뭐가 될까? 지금처럼 아무 자극도 열정도 없는 상태에서 산다 한들 뭐가 될까? - 173쪽

왜 나는 자살하지 않는 걸까? 권력과 투쟁해봐야 어차피 허무한 저항밖에 더 되나? 왜 살아가는 걸까? 삶에 어떤 미련이 있는 걸까? 죽을 수가 없다. 왜! 사는 데 무슨 의미가 있다고. 추하고 죄 많고 수치스러운 동물들이 서로를 행햐 꿈틀거리는 이 세상! 무슨 미련이 있다고. - 223쪽

침묵은 금
마음속으로도 쓸데없는 말은 하지 말 것.
나는 나의 역사를 찾아 나서자. - 245쪽

자기창조를 완성할 때까지 나는 죽지 않겠습니다. - 267쪽

분노와 증오를 드러내며 항의의 의미로 자살을 시도하는 것만큼 몰주체적인 자만이 없다. 자살은 사람들에게 패배라는 단 한 마디로 전해질 뿐이다. - 303쪽

산다는 건 타협의 연속인가? 중요한 건 어느 지점에서 타협의 접점을 발견하는가 하는 것이다. - 313쪽

얻어맞으면 한 대 때릴 수 있을 정도로 자기애를 가질 것. - 32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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