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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불평등 기원론 ㅣ 책세상문고 고전의세계 27
장 자크 루소 지음, 주경복 옮김 / 책세상 / 2003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어린애가 노인에게 명령하고 바보가 현명한 사람을 이끌며 대다수의 사람들이 굶주리고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최소한의 것마저 갖추지 못하는 판국인데 한줌의 사람들에게서는 사치품이 넘쳐난다는 것은 명백히 자연의 법칙에 위배되기 때문이다. - 140쪽
이 문장은 마치 1755년 루소가 자본주의 사회의 미래를 내다본 것 같은 예언이다. 『인간 불평등 기원론』이란 논문에서 그는 ‘존재’가 아닌 ‘소유’를 불평등의 원인으로 지적했다. 모은 인간이 평등했던 원시 시대는 역사적 차원의 시대 설정이 아니었다. 이는 개념적 차원에서 악, 도덕, 평등이란 개념조차 필요 없었던 시기를 말한다. 사유재산이 발생하고 세습과 유산 상속이 가능해지자 자연스럽게 권력과 계급이 만들어졌다.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나지만 모든 인간은 불평등에 시달리며 산다.
디드로와 달랑베르 등 계몽주의 사상가들과 다른 생각을 가졌던 루소는 『사회계약론』과 『에밀』로 유명하다. 프랑스 대혁명의 사상적 기초를 제공했고 불우한 말년을 보냈으나 루소가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은 시대를 앞섰다. 학문과 예술의 발달과 더불어 도덕이 타락했다고 주장하며 계몽주의 사상에 반기를 들었던 그는 경제와 계급의 관점이 아니라 ‘정치’가 인류의 운명을 좌우한다고 생각했다. 군주제와 귀족제 그리고 민주제가 가진 ‘불평등’의 요소가 어떻게 흘러왔는지 살펴보자. 세습된 왕 혹은 소수의 귀족 혹은 선출된 대표자. 무엇이 다른가. 대한민국은 불평등을 해소하려는 방향을 지향하고 있을까.
권력은 경제로 넘어갔다는 대통령도 있었고, 기업하기 좋은 나라를 만들고, 국가를 수익모델로 생각한 대통령도 만났다. 멍청한 꼭두각시를 믿고 맡기기도 했으나 ‘불평등’은 해소되지 않았다. 정치 제도의 문제일까? 개헌을 하면 세상이 달라질까? 패배주의와 정치 혐오 발언이 아니다. 260년 전 루소의 말이 대한민국의 현실을 분석하는 잣대로 활용될 수도 없다. 다만 이 책을 통해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불평등’ 자체에 대한 문제의식이다. 그 원인과 대책을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면 구조적인 문제를 개선하고 보완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해야하는 게 아닐까.
그것은 사회 계층 구조를 허물고, 경제 민주주의를 이루자는 선언적 의미와 다르다. 인간을 바라보는 근본적인 관점의 변화, 사회 공동체가 지향해야할 목적지의 문제다. 어디를 보고 어떻게 흘러가는가. 권력과 권력자를 구별하지 못하고 경제 시스템과 기업의 목적을 다르게 해석하고 분배의 정의에 합의하지 못하며 서로 다른 복지 개념을 가진 자들의 쟁투가 우매한 유권자의 판단을 흐린다.
“남이 해주길 바라는 대로 남에게 행하라”는 〈마태복음〉의 말씀을 듣고 신자들의 행동이 달라졌을까. 그들이 만든 세상은 어떠한가. “타인의 불행을 되도록 적게 하여 너의 행복을 이룩하라”는 말씀을 인용한 루소의 생각은 충분히 미루어 짐작할 수 있지 않을까. 그가 논박하고자 한 것은 18세기 프랑스 사회의 현실이 아니라 인간 공동체가 만들어낸 정치체제와 인간들의 속성이다.
아무리 불합리한 상황에서도 개인적 손해를 감수하며 발언하고 행동하는 인간은 거의 없다. 쉽게 끓는 냄비처럼 유행을 타고 시류에 영합하며 함께 손가락질하고 뉴스를 소비한다. 손바닥처럼 뒤집어 같은 논리를 자신에게 적용하기는 싫고 모든 영역에 동일한 기준을 적용하고 싶지도 않다. 합리적 이성과 논리적 증오는 불가능하다. 거시적 관점으로 구조를 바꾸고 판을 흔들자는 선언들은 하루 이틀의 문제가 아니다. 찧고 까불다 이내 지쳐 나뒹굴고 손톱만큼의 손해라도 생길 것 같으면 외면하고 제 잇속만 차리는 건 정치인이나 우리들이나 마찬가지가 아닐까.
루소는 인간의 불평등을 자연법이 적용되던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인간의 자연상태에서의 인간을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라고 본 홉스와 대척점에 서 있던 루소는 왜 그 시절을 그리워했을까. 과거로의 회귀, 자연으로 돌아가자는 선언이었을까. 그건 아마도 당대 현실에 대한 부정이 아니라 추악한 욕망과 불평등한 사회 구조에 대한 사자후가 아니었을까. 진영 논리에 갇힌 정치, 사회, 경제, 문화 – 제대로 읽어낼 사상가도 논객도 부재한 현실이 답답하다, 아니 한심하다. 보이지 않는 게 아니라 침묵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자유에 대한 사랑에 관하여 정치가들은 철학자들이 자연 상태에 대해 말한 것과 같은 궤변을 곧잘 늘어놓는다. 그들은 보이는 사물을 가지고 아직 본 적이 없는 전혀 다른 사물을 판단한다. 그리고 눈앞의 사람들이 노예 상태를 참아내는 것을 보고는 인간에게는 예속에 대한 자연적인 성향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자유란 순결이나 미덕 같은 것으로서 그것을 잃어버리면 그것에 대한 취미도 곧 잃어버리게 된다는 사실을 생각해보지도 않는다. - 12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