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픔이 길이 되려면 - 정의로운 건강을 찾아 질병의 사회적 책임을 묻다
김승섭 지음 / 동아시아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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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진실을 원하지 않아. 진실은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하지.”

 

오래된 영화 속의 대사다. 그때는 틀리고 지금은 맞다. 도서 선정도, 책을 읽는 방법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건 언제. 그래서 영화 다시 보기, 책 다시 읽기는 충분한 사이가 필요하다. 진실이 고통스런 이유는 무엇일까. 아니 무엇이 진실일까. 인문학은 인간과 세계에 대한 정답을 내놓지 못한다. 진실은 없다고 말한다. 다만 아주 조심스럽고 신중하게 그러나 근본적이고 원론적인 문제를 제기한다. 현상이 아니라 본질에 천착하면 정답보다 분명한 길이 보이기 때문이다.

 

김승섭의 아픔이 길이 되려면은 과학자의 사회학이다. 인문학과 달리 과학의 눈은 원인과 결과를 분명하게 내놓는다. 질병의 원인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서 출발한 의학 분야가 역학epidemiology이다. 그러나 원인의 원인은 무엇일까. 여기부터는 인문학적 사유가 필요하다. 본질적인 원인은 무엇인가. 스스로 사회 역학social epidemiology을 연구하는 학자라고 밝힌다.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의 원인을 흔히 스트레스라고 한다. 스트레스의 원인은 무엇인가. 다양한 원인들로 인해 질병이 발생하는 과정을 묘사하기 위해 역학 연구들은 원인의 그물망이라는 용어를 사용해왔다. 당신은 그물을 만드는 거미를 본 적이 있는가? 질병의 사회학과 정치적 원인은 무엇일까?

 

인간의 몸은 마음의 영향을 받는다. 그 마음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한 순간도 머물지 않고 흔들린다. 생물학적 나이를 제외하면 모든 삶은 그대로 몸에 반영된다. 체질과 음식은 물론 관계, , 날씨, 지역, 정치, 경제, 문화까지 우리 질병의 원인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문제는 과학적 증거다. 김승섭은 과학적 합리성을 세 가지로 제시한다. 첫째, 데이터에 기초한 사고다. 둘째는 지식의 생산과정에 대한 의심이다. 셋째는 근거의 불충분함이 변명이 되는 것에 대한 경계다. 1부 말미에 제시한 지극히 개인적인김승섭의 기준에 무한 공감했다. 과학적 진실은 인문학보다 객관적이라는 비교 우위가 아니라 논란의 여지가 적고 설득력을 얻을 수 있는 이유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질병 치료와 무관하다. 질병의 원인을 찾는다. 김승섭은 고통은 근본적으로 개인적인 것입니다. 타인의 고통을 나눈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고통이 사회구조적 폭력에서 기인했을 때, 공동체는 그 고통의 원인을 해부하고 사회적 고통을 사회적으로 치유하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합니다.”(176)라는 말로 이 책의 목적을 분명히 한다.

 

낙태 금지, 삼성반도체 직업병,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 세월호 생존자, 동성애와 트랜스젠더, 가습기 살균제 사망사건……. 나열하기도 힘들만큼 많은 사건, 사고가 매일 인간 삶의 일부를 이룬다. 이런 사회 현상은 인간의 마음에 깊은 상처를 남기고 그 상처는 고스란히 질병으로 이어진다. 인상적인 사례는 이런 사회적 현상 뿐 아니라 절약형질 가설이다. 성인이 되어도 몸에 남겨진 태아의 경험은 시간의 간격때문에 그 원인을 찾아내기조차 힘들다. 모르면 두렵다. 그래서 인간은 종교를 발명하고 신을 만들어낸 것일까.

 

의학 지식을 나열하고 건강을 관리하는 책이라면 읽다가 덮었을 것 같다. 제목 때문에 의사가 쓴 에세이라고 생각하고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책모임 대상도서가 아니었다면 읽지 않았을 좋은 책을 만났다. 저자의 첫 책이다. 과학자는 인문학자와 달리 과학적 합리성을 토대로 한다. 세상에는 많은 책이 매일 쏟아져 나온다. 양념과 포장을 뜯어내면 반복되는 이야기가 절반. 그 중에 절반은 노하우와 실용적 방법론을 전한다. 각자 자신의 영역에서 새로움을 추구하는 책, 조금 더 넓은 시야를 확보할 수 있도록 돕는 책, 고통스럽지만 진실을 찾아가는 책을 더 만나고 싶다. ‘쉽고 재밌게는 전가의 보도가 될 수 없다. 사회역학자로서 뿐만 아니라 아름다운 사회를 만드는 작가로서 눈여겨 볼만한 김승섭을 환영한다. 다음 책도 기대된다.

 

아름다운 사회는 나와 직접적으로 관계가 없는 타인의 고통에 대해 예민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사회, 그래서 열심히 정직하게 살아온 사람들이 자신의 자존을 지킬 수 없을 때 그 좌절에 함께 분노하고 행동할 수 있는 사회라고 생각해요. 점점 그런 인간을 시대에 뒤떨어진 천연기념물처럼 만들고, 타인의 고통 위에 자신의 꿈을 펼치기를 권장하고 경쟁이 모든 사회구성의 기본 논리라고 주장하는 사회가 되어가는 게 저는 싫어요. - 303

 

가난한 사람들의 시체만 해부되고 기록되면서 해부학의 역사에는 여러 오점이 남습니다. 왜냐하면 가난은 인간의 몸을 변화시키기 때문입니다. - 53쪽

우리는 망망대해에서 배를 뜯어 고쳐야 하는 뱃사람과 같은 신세다. 우리에게는 부두로 가서 배를 분해하고 좋은 부품으로 다시 조립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 - 오토 노이라트 재인용, 83쪽

고통은 근본적으로 개인적인 것입니다. 타인의 고통을 나눈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고통이 사회구조적 폭력에서 기인했을 때, 공동체는 그 고통의 원인을 해부하고 사회적 고통을 사회적으로 치유하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합니다. - 176쪽

아름다운 사회는 나와 직접적으로 관계가 없는 타인의 고통에 대해 예민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사회, 그래서 열심히 정직하게 살아온 사람들이 자신의 자존을 지킬 수 없을 때 그 좌절에 함께 분노하고 행동할 수 있는 사회라고 생각해요. 점점 그런 인간을 시대에 뒤떨어진 천연기념물처럼 만들고, 타인의 고통 위에 자신의 꿈을 펼치기를 권장하고 경쟁이 모든 사회구성의 기본 논리라고 주장하는 사회가 되어가는 게 저는 싫어요. - 30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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