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서문
버크.베카리아.니체 외 27인 지음, 장정일 엮음 / 열림원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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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래 전에 장정일을 시인으로 처음 만났다. 민음사에서 펴낸 햄버거에 대한 명상이었다. 이후에 독서일기시리즈를 한동안 탐독했다. 김현의 행복한 책읽기와 더불어 스무살 언저리에서 실존적인 고민에 빠지게 했던 책들이다. 아마도 내 책읽기의 모태가 된 책이 아니었나 짐작한다. 다양한 시인과 소설가 그리고 많은 작가들의 영향을 받았겠지만 책읽기는 좀 다른 분야다. 가장 쉽고 만만하게 혹은 가장 속물적이고 과시적으로 여길 수 있는 대상이 책이다. 책은 자기계발이라는 이름으로, 성공의 비법으로 여전히 과분한 헌사를 받는다. 여기에 편승한 11책 쓰기, 자서전 쓰기, 저자가 되는 법 등을 더하면 책을 읽고 책을 쓰는 방법과 사람은 이제 차고 넘친다. 타이틀이 필요하다면 누구나 책을 낼 수 있다. 원한다면 언제든 작가님이 될 수 있다.

 

동사무소 직원이 되어 책을 읽겠다던 소년이 지금은 작가가 되었다. 동사무소 직원이 되는 것이나 작가가 되는 것이나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일 뿐이니, 현재의 내가 소년 시절의 꿈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었다고는 차마 말 못 하겠다. 그런데도 지금의 내가 소년 시절의 희망대로 동사무소 직원이 되었더라면, 도리어 작가가 되어보겠노라고 블로그를 만들어 글을 올리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게 뭐라고. 안타까운 일이다. - 5

 

위대한 서문첫 문단이다. 장정일이 지울 수 없는 인상을 남긴 대목은 바로 이 대목이다. 그의 동사무소 직원 운운. 독서일기서문에서 그는 동사무소 직원이 되어 새벽 두 시까지 책을 읽다가 잠이 들고 싶은 어릴 적 꿈을 이야기했다. 발칙한 상상력과 시니컬한 글쓰기가 마음에 들었다. ‘~하지 않는 작가다. 글을 쓰는 것보다 책을 읽는 일이 훨씬 행복하다는 사실을 그는 일찍부터 주장해 왔다. “나는 책을 읽는 데서 느끼는 즐거움만 한 것을 한번도 글을 쓰는 일에서 느낀 적이 없다. 글쓰기란 먹고살기 위해 이 재주밖에 부릴 게 업는 사람이 마감이라는 채찍을 맞으며 노역을 하는 것일 뿐, 그 일을 하면서 기쁨마저 누린다면 도착倒錯이다.”는 그의 말에 백 번 공감한다.

 

결혼은 물론 아이를 낳아 기를 생각도 없이, 다만 딱딱한 침대 옆자리에 책을 쌓아놓고 원없이 읽는다는 꿈은 이루었을까. 인간 장정일은 나는 잘 모른다. 그의 시와 소설 그리고 잡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책을 보다가 이제는 그가 엮은 서문까지 읽는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책은 장정일의 말대로 그가 한 일이 별로 없다. 하지만 그것은 가장 겸손한 태도다. 서문을 모았을 뿐이라고 말하지만 모을 수 있는 능력과 안목을 기르고 통찰력 있게 엮는 데 그는 한 평생이 걸렸다.

 

위대한 서문의 서문도 위대하다.

 

서문은 늘 본문보다 짧지만, 저자의 욕망이 고스란히 투영된 서문은 그것의 실현물인 본문보다 크다. 어쩌면 바로 그렇기 때문에 저자는 계속 글을 쓰게 되는지도 모른다. 자신의 서문을 끝내 완성하기 위하여. - 13

 

그가 서문에서 읽어낸 작가의 욕망은 긴 세월 탐독의 결과일 뿐 아니라 스스로 글을 쓰며 느낀 작가의 굴레를 드러낸다. 허명을 드러내고 작가의 타이들을 얻기 위한 글쓰기가 아니라, 세속적인 욕망이나 사회적 평판을 얻기 위한 책이 아니라, 한 생명을 바쳐 만들어낼 만큼 가치 있는 책읽기와 글쓰기는 가능한가.

 

우선 이 책에 실린 서른 권의 책 목록이다.

 

1 플라비우스 베게티우스 레나투스, 군사학 논고

2 제바스티안 브란트, 바보배

3 데시데리위스 에라스뮈스 로테로다뮈스, 격언집

4 베네딕트 데 스피노자, 신학정치론

5 조너선 스위프트, 걸리버 여행기

6 샤를 루이 드 스콩다 몽테스키외, 법의 정신

7 장 자크 루소, 인간 불평등 기원론

8 에드먼드 버크, 숭고와 아름다움의 이념의 기원에 대한 철학적 탐구

9 체사레 보네사나 마르케세 디 베카리아, 범죄와 형벌

10 메리 울스턴크래프트, 여권의 옹호

11 도나시앵 알퐁스 프랑수아 드 사드, 사랑의 범죄

12 노발리스, 파란꽃

13 앙리 벵자맹 콩스탕 드 르베크, 아돌프

14 카를 필리프 고틀리프 폰 클라우제비츠, 전쟁론

15 쇠렌 오뷔에 키르케고르, 죽음에 이르는 병

16 요한 카를 프리드리히 로젠크란츠, 추의 미학

17 샤를 피에르 보들레르, 악의 꽃들

18 프리드리히 막스 뮐러, 독일인의 사랑

19 찰스 로버트 다윈, 종의 기원

20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옙스키, 카라마조프네 형제들

21 프리드리히 엥겔스,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

22 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 도덕의 계보학

23 앙브루아즈 폴 튀생 쥘 발레리, 테스트 씨

24 앙드레 기욤 폴 지드, 지상의 양식

25 에밀 에두아르 샤를 앙투안 졸라, 나는 고발한다

26 앙리 루이 베르그송, 웃음

27 지그문트 슐로머 프로이트, 꿈의 해석

28 게오르그 짐멜, 렘브란트

29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 인상과 풍경

30 요한 하위징아, 호모 루덴스

 

이 목록에서 겨우 3분의 1쯤 읽어 자괴감이 든 것이 아니라, 분명히 장정일이 썼을 각 서문 앞에 놓인 작가와 책에 관한 간략하지만 명쾌한 해설 때문에 잠시 숙연해졌다. 인터넷에 떠도는 정보를 모으고 정리하는 것과 조금 다른 결이 느껴진다. 곳곳에 품이 든 흔적은 서른 개의 서문과 어울려 이 책을, 이 책의 목록을 두고두고 참고하게 할 것 같은 느낌이다. 아직도 갈 길은 멀고 날은 금세 저문다.

 

우리는 사실 우리 자신에게 필연적으로 낯선 존재로 있고, 우리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며, 우리 자신을 혼동하지 않을 수 없다. ‘모든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 가장 먼 존재이다라는 명제는 우리에게 영원한 의미를 지닌다. 우리 자신에게 우리는 인식하는 자가 아닌 것이다…… - 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 도덕의 계보학, 286

 

책 띠지에 붙은 당대 최고 독서가라는 장정일에 대한 수식어가 가장 적절하다. 당대 최고의 작가보다 독서가라는 명명이 빛난다. 수많은 사람들이 책에 대해 이야기한다. 나름의 노하우를 전하고 겁을 주고 비법을 뽐내며 명예를 드높인다. 지극히 이기적인 책읽기는 그리 권할만한 일이 아니라는 샤를 단치의 말 속에 숨어 있는 의미를 새겨듣는 사람은 많지 않다. 책읽기의 본질은 우리 자신을 이해하기 위한 일이다 겨우 나를 인식할 수 있을 정도의 힘을 갖는 데도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자신은 얼마나 낯선 존재인가.

 

서른 권의 고전에서 뽑아 낸 주옥같은 서문을 읽는 동안 나는 책읽기와 글쓰기에 대해 다시 한 번 깊이 고민하게 되었다. 어렵고 두려운 일이다, 글을 쓴다는 행위는. 그러나 즐겁고 행복하다, 책을 읽는 동안은. 사드의 말대로 구두를 만들지언정 책은 쓰지 말라는 충고를 조금 더 깊이 고민해 봐야겠다. 누군가를 지겹게 하고 있다면.

 

그대가 선택할 수 있는 직업이 널려 있으니, 구두를 만들지언정 책은 쓰지 말라.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그대를 무시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대가 우리를 지겹게 만들지 않는다면 아마 우리는 그대를 더 좋아할지도 모른다. - 알퐁스 프랑수아 드 사드, 사랑의 범죄, 191

 

동사무소 직원이 되어 책을 읽겠다던 소년이 지금은 작가가 되었다. 동사무소 직원이 되는 것이나 작가가 되는 것이나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일 뿐이니, 현재의 내가 소년 시절의 꿈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었다고는 차마 말 못 하겠다. 그런데도 지금의 내가 소년 시절의 희망대로 동사무소 직원이 되었더라면, 도리어 작가가 되어보겠노라고 블로그를 만들어 글을 올리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게 뭐라고. 안타까운 일이다. - 5쪽

나는 책을 읽는 데서 느끼는 즐거움만 한 것을 한번도 글을 쓰는 일에서 느낀 적이 없다. 글쓰기란 먹고살기 위해 이 재주밖에 부릴 게 업는 사람이 마감이라는 채찍을 맞으며 노역을 하는 것일 뿐, 그 일을 하면서 기쁨마저 누린다면 도착倒錯이다. – 6쪽

서문은 늘 본문보다 짧지만, 저자의 욕망이 고스란히 투영된 서문은 그것의 실현물인 본문보다 크다. 어쩌면 바로 그렇기 때문에 저자는 계속 글을 쓰게 되는지도 모른다. 자신의 서문을 끝내 완성하기 위하여. - 13쪽

나는 경건을 가장하여 채용된 편견들이 정신 안에서 얼마나 깊게 뿌리내렸는지 알고 있다. 나는 또한 대중이 두려움에서와 마찬가지로 미신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안다. 마지막으로, 나는 그들이 완고함에 있어서 불변이며, 이성에 의해 인도되지 않는다는 것과, 그들의 칭찬과 비난이 충동에 의해 좌우된다는 것을 안다. 그러므로 나는 보통 사람들에게 이 책을 읽도록 권하지 않으며, 그와 동일한 감정적 자세의 희생양인 모든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다. 진실로, 나는 그들이 습관에 따라서 이 책을 그릇되게 해석함으로써 스스로 성가신 존재가 되려고 하기보다는 철저하게 이 책을 무시했으면 좋겠다. 왜냐하면 그들 자신에게는 아무런 이익도 없는데, 그들이 이성은 신학의 하인이 되어야만 한다는 믿음에 의하여 철학적 문제들에 대해 좀더 자유롭게 접근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방해할 것이기 때문이다. - 스피노자, 『신학 정치론』(1670년), 103쪽

그대가 선택할 수 있는 직업이 널려 있으니, 구두를 만들지언정 책은 쓰지 말라.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그대를 무시하지는 않을 거이다. 그대가 우리를 지겹게 만들지 않는다면 아마 우리는 그대를 더 좋아할지도 모른다. - 알퐁스 프랑수아 드 사드, 『사랑의 범죄』, 191쪽

우리는 사실 우리 자신에게 필연적으로 낯선 존재로 있고, 우리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며, 우리 자신을 혼동하지 않을 수 없다. ‘모든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 가장 먼 존재이다’라는 명제는 우리에게 영원한 의미를 지닌다. 우리 자신에게 우리는 ‘인식하는 자’가 아닌 것이다…… - 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 『도덕의 계보학』, 28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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