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경사 바틀비 - 미국 창비세계문학 단편선
허먼 멜빌 외 지음, 한기욱 엮고 옮김 / 창비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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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건 없다. 하지만 시간을 조금 오래 견뎌내는 건 말이 아니라 글이다. 글쓰기는 침묵과 수행이다. 부족한 인간이 안간힘을 쓰며 토해내는 사자후. 고전은 그런 의미에서 가장 오래 버티는 인류의 자산이다. 1830~1930년대의 미국 대표 단편소설을 엮은 필경사 바틀비는 근대와 민주주의, 청교도와 자본주의, 인디언과 흑인노예가 충돌하며 태동한 미국의 역사를 반증한다. 영국의 식민지에서 독립해서 최초의 민주적 근대국가를 이뤘으나 아메리카 원주민을 학살하고 흑인을 노예로 삼은 모순이 내재한 나라가 미국이다. 인종과 계층, 지역과 종교가 충돌하며 미국은 오늘에 이른다. 지구상에 어떤 나라보다도 복합적이고 다층적이며 생동하는 삶이 얽혀있다. 겨우 열 한편으로 미국의 국민문학 형성기부터 모더니즘이 한창이던 시기를 읽어낼 수는 없으나 이 책에 수록된 단편은 시대를 읽어내기에 충분하다.

 

너내시얼 호손의 젊은 굿맨 브라운, 에드거 앨런 포우의 검은 고양이도 인상적이지만 허먼 멜빌의 필경사 바틀비는 무라타 사야카의 소설 편의점 인간을 연상시키는 독특한 작품으로 명불허전이다. 이런 인물 유형을 창조한 작가에게 경의를 표할 수밖에. 월가로 상징되는 미국 자본주의 태동기에 바틀비는 다양한 존재로 해석 가능하다. 문학적 모호성 ambiguity를 함유한 독특한 인물이다.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처럼 관찰자시점은 이 소설이 갖는 가장 큰 미덕 중 하나다.

 

구인광고를 보고 어느날 아침 젊은이 하나가 여름이라 문을 열어놓은 사무실 문간에 꼼짝 않고 서 있었다. 지금도 그 모습이 눈에 선하다! 창백할 정도의 단정함, 애처로운 기품, 그리고 치유할 수 없는 고독. 그가 바틀비였다. - 허먼 멜빌, 필경사 바틀비, 58

 

바틀비의 행동은 일반적이지 않다. 정상적인 패턴을 벗어난다. 역자가 몇 년을 고심했다는 “I would prefer not to”는 바틀비를 설명하는 문장이다. 한기욱은 그렇게 안하고 싶습니다라고 번역했다. 현실에 대한 거부, 관습적 사고에 대한 저항이라면 지나친 해석일까. 바틀비의 말과 행동은 독자 나름의 방식대로 받아들질 뿐이다. 당대 미국 사회를 관통하는 비판적 관점이 아니라 현대인이 일상에서 경험하는 부조리에 대한 거부일까. 단호한 외침이 아니라 침착하고 온화한 언어는 텍스트의 의미와 다른 울림을 준다. 속으로 몇 번이나 되뇌이고 다짐했다. 그렇게 안 하고 싶습니다.

 

이밖에도 마크 트웨인의 캘레바래스 군의 명물, 뜀뛰는 개구리, 셔우드 앤더슨의 달걀, F. 스콧 피츠제럴드의 겨울 꿈이 인상적이다. 백 년이 훌쩍 넘은 번역된 단편임에도 장편에서 느낄 수 없는 단편의 힘을 느낄 수 있다. 19세기말~20세기초 세계사의 풍랑을 겪는 동안 미국인의 삶은 동시대 한국인의 삶과 다른 문제의식을 지녔으리라. 문화와 전통이 다르고 역사적 배경이 다르면 생각도 행동도 차이가 있다.

 

오래전에,” 그가 말했다. “오래전에 내 속에 무엇인가가 있었지만 이제 그것은 사라졌어. 이제 그것은 사라졌어, 사라졌단 말이야. 난 울 수 없어. 마음을 쓸 수도 없어. 이제 그것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거야.” - F. 스콧 피츠제럴드, 겨울 꿈, 306

 

돈에 속고 사랑에 우는 평범한 사람들의 속내는 시대와 공간을 초월한다. 이수일와 심순애 같은 신파도 있고 위대한 개츠비같은 미국판 러브스토리다 있다. 피츠제럴드는 단편 겨울 꿈에서 유사한 모티브로 현대인의 속내를 이렇게 짚어낸다. 내 속에 무언가 사라졌고 이제 그것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자각을 하는 순간, 달의 뒷모습이 궁금해진다. 우주로 간 전기차 테슬라도 궁금하고 유리가가린의 소식도 듣고 싶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무엇일까. 지켜야 할 것은 또 무언지. 먼지처럼 떠돌다 이내 사라질 나와 당신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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