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이 칼이 될 때 - 혐오표현은 무엇이고 왜 문제인가?
홍성수 지음 / 어크로스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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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의 제목은 내용 전체를 포괄하며 핵심을 전달할 수 있어야 한다. 책 제목도 마찬가지다. 독자에게 호기심과 흥미를 유발시켜야 할 뿐 아니라 책 전체 내용을 응축하거나 상징해야 한다. 홍성수의 말이 칼이 될 때는 매력적인 제목에 비해 내용은 단 하나에 집중하고 있어 밸런스가 맞지 않는다. 이 책은 혐오를 위한, 혐오에 의한, 혐오의책이다.

 

일상적인 대화, 공적인 언어가 갖는 말의 힘에 대한 폭넓은 논의가 아니다. 혐오 표현은 말과 글을 모두 포함한다. 사적인 언어라기보다는 사회적 의제이며 상징적 메시지다. 말이든 글이든 언어는 사고를 반영한다. 개인과 사회의 가치관과 지향점을 점검할 수 있는 도구가 언어다. 언어는 지문과 같다. 개인에게는 정치적 성향부터, 취향, 성격, 지적 수준, 관심사, 종교, 인종, 직업, 나이까지 가늠할 수 있는 도구다. 한 사회의 언어는 소통방식, 공동체의 의식수준, 규범과 질서를 드러낸다. 혐오표현도 당연히 개인 혹은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는 현실에 대한 점검 도구로 활용 가능하다. 대표적으로 강남역 여성 살해 사건, 맘충과 노키즈존, 영화 청년경찰, 퀴어문화축제와 반동성애운동을 통해 한국의 혐오 논쟁을 다루고 있지만 이 책은 혐오에 대한 법률적 논쟁 보고서에 가깝다.

 

법도 시대정신의 반영이며 사회 구성원의 의식이 투영된 결과다. 각국의 특성과 문화, 공동체의 합의가 법적용에 영향을 미친다. 민주주의가 발달한 서구 유럽과 일부 선진국을 참고할 수는 있으나 그들의 법이 우리의 지향점이 될 수는 없다. 미국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저자는 우리 사회에 촉발된 혐오 논쟁을 다양한 각도에서 살피고 있지 못하다. 혐오 논쟁의 문제를 짚어내고 법적 제재가 가능한가, 형법으로 통제하는 게 올바른가, 사회적 논의와 대한은 무엇인가, 생활 속의 혐오는 없는가, 일반인들의 혐오의식은 어디에서 기인하는가, 혐오가 오로지 좌파의 아젠다인가, 표현의 자유와 충돌하는 지점에서 우리의 선택은 무엇인가. 망치 대신 메스가 필요하다면 메스를 대는 부분에 대한 합의는 가능한가, 유럽식과 미국식 제제 어느 쪽이 우리에게 필요한가, 우리 사회 고유의 전통과 문화에서 발원한 혐오의 근원은 무엇인가, 사회경제적 약자와 비정규직, 청년층에 대한 이해와 분석 없이 여혐과 남혐의 이분법적 접근 방식은 타당한가……

 

혐오 표현에 대한 기본적인 의식조사와 통계 분석도 없이 지극히 편향된 시각으로 시류에 편승한 책이라는 판단은 나만의 생각인가. 내용에 동의 여부를 떠나 논의의 흐름이 정교하지 못하니, “사전적 의미로 혐오는 매우 싫어하고 미워한다는 뜻이다. 한국어에서 혐오는 혐오시설’, ‘혐오식품처럼 시설이나 음식을 수식하는 말로 주로 쓰여왔다. 혐오표현은 헤이트 스피치hate speech’를 번역한 말이다, 영어에서 헤이트는 극도의 싫음, 역겨움, 적대감을 뜻한다.”(24) 정도로 만족해야 한다.

 

우선 저자는 남혐과 개독은 혐오 표현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최소한 현재’ ‘한국 사회의 맥락에서 여혐과 남혐, 이슬람혐오와 기독교혐오를 동일선상에 놓고 이거나 저거나 다 나쁘다고 할 수는 없는 일”(48)이라고 말한다. 남혐은 이후에 미러링을 통해 그 사례를 제시하지만 B급 좌파, C급 페미니스트쯤 되는 내게 읽기에도 논리가 엉성하다. 여혐과 남혐, 이슬람 혐오가 기독교혐오가 등가로 놓일 수는 없고 같은 맥락으로 비판할 수도 없지만 여기서 양비론을 비판할 수는 없다. 남혐과 개독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듯한 논리는 이해할 수 없다.

 

맘충이나 노키즈존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아이와 엄마가 차별받지 않고 존중받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맘충 따위는 농담으로 넘길 수 있다 …… 맘충이라고 말할 자유와 노키즈존 영업을 할 자유를 얻길 원한다면 아이와 엄마가 차별받는 사회 현실부터 바꿔야 한다. - 53

 

예를 들자면, 이 부분에서 차별받는 사회 현실은 어떻게 바꾸자는 말인가. 개인적으로 가장 싫어하는 표현이다. 하나마나한 소리다.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자라는 한 문장이면 인문학 코너의 모든 책이 다 필요 없다. 맘충이라는 말을 현실에서 들어본 적도 없고, 노키즈존을 본 적도 없어서 사회적인 이슈가 될 정도의 문제인지는 모르겠으나 공공시설을 이용하는 사람들 간의 예의, 암묵적 합의를 깨는 사람, 이에 대한 지나친 분노가 충분히 문제가 될 수는 있다. 이 문제 자체를 떠나 차별받지 않고 존중받는 사회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독자의 인식 변화를 촉구하는 발언인지, 반성과 성찰을 요구하는 말인지 모르겠다.

 

비유하자면, 우리는 대형 화산 폭발로 인해 우리 땅 밑에 거대한 용암이 흐르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과 같다. 그렇다면 그 용암을 제거해야 한다. 용암의 존재를 확인한 이상 화산 분출만 막아봤자 별 소용이 없다. 남성들의 인식 기저에 있는 여성혐오는 살인과 같은 강력 범죄로만 표출되는 것이 아니다. - 104

 

앞뒤 맥락을 이어 여러 번 반복해서 읽어도 모든 남성들의 인식 기저에여성혐오가 땅 밑에 용암처럼 흐르고 있다는 주장이다. 한국사회의 남성에게 달린 의 위치가 차별이다. 여성의 관점에서는 남성의 모든 말과 생각, 시선이 혐오라는 주장이다. 그것이 범죄로만 표출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에 할 말이 없어졌다. 저자가 이 책을 쓴 목적이 궁금해졌다. 존재 자체가 여성혐오의 유전자를 보유하고 있다는 말이니 조심하고 삼가라는 말인지, 그 인식 기저를 바꿀 용기를 내라는 말인가.

 

표현의 자유를 어떤 가치보다 소중하게 생각하는 미국의 수정헌법에 따라 법률적 규제보다 사회적, 문화적 규제가 철저하고 기업과 학교 등 자율적 자정 기능이 제대로 발휘되고 있는 미국과 법률로 규제하는 유럽을 비교한 내용이면 충분했다. 어느 쪽이든 장단점이 있기 때문이다. 동전의 양면처럼 표현의 자유와 혐오표현규제처벌법은 각각의 문제를 안고 있다. 그러나 저자는 미국과 같은 사회적 조건을 만들기 위해 분투하는 동시에미국처럼 혐오표현규제처벌법에 반대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야말로 진정한 숭미(!)주의자이자 혐오표현 문제를 국가의 개입 없이사회에서 직접 해결하려는 행동가들일 것이다. 혐오표현 규제 옹호론이 맞서야하는 가장 까다로운 상대도 바로 이들이다.”(141)라고 주장한다. 원천 봉쇄의 오류다.

 

혐오표현에 대한 법률이 미비하고 문제 인식이 부족한 부분에 대해서는 백퍼센트 공감한다. 섬나라처럼 고립된 지정학적 위치와 유럽이나 미국처럼 인종, 종교 문제가 첨예하지 않았고 문화적 전통이 다르기 때문에 벌어진 당연한 결과다. 법은 현실을 앞서 갈 수 없다. 사회 현실과 맥락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미국이나 유럽과 비교하는 습관과 오류를 이 책도 피해가지 못했다. 토양이 다르면 자라는 식물이 다르고 같은 작물도 맛이 다르다. 주장과 설득이 아니라 학문적인 비교, 정리, 논쟁거리를 제시하는 정도에 머물러야 했다.

 

지금까지 나의 논의는 책의 내용과 저자의 주장과 무관한 형식과 논리에 대한 엉성한 화풀이였다. 새로운 앎을 얻은 것도 아니고, 기존의 문제를 새로운 시각으로 접근하지도 않았으며, 대안을 제시하거나 해결방안을 제안하지도 못했으니 지식 습득을 위한 책이라면 다른 방식이었으면 어땠을까 싶은 개인적인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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