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예술은 프로파간다다 - 조지 오웰 평론집
조지 오웰 지음, 조지 패커 엮음, 하윤숙 옮김 / 이론과실천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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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인터넷은 놀랍고 신기하다. 성인이 된 후에야 모뎀으로 겨우 접속하던 시절. 한석규와 전도연처럼 영화 같은 일은 경험하지 못했지만 네트워크 세상은 사람들을 새로운 세계로 이끌었다. 우매한 군중은 직접 민주주의에 버금가는 여론을 형성한다. 각자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개인은 중세에서 근대로 이행하던 시기에 벌어졌던 신은 죽었다의 재현이었다. 통제된 언론과 권력기관의 압력은 석기시대의 전설이 되었다. 대신, 실시간으로 퍼지는 뉴스와 sns을 통해 확산되는 사건은 수많은 부작용을 낳았다. 홍수에 휩쓸리듯 전체 판을 읽지 못하는 분노, 혐오, 증오는 확대 재생산된다. 만인의 만인에 의한 투쟁을 하는 사람도 생긴다. 피아 구분 없이 총질을 하는 사람도 있고 이념, 정당, 계층, 성별에 따라 논리와 이성을 상실한 사람도 많다. 홍성수의 말이 칼이 될 때를 법과 인권, 표현의 자유에 대한 쟁점으로 읽지 못하는 사람들이 여기에 해당할까?

 

대중의 관행과 의견을 의식과 지성을 발휘해 조작하는 것은 민주주의 사회에서 중요한 요소이다. 사회의 이 보이지 않는 메커니즘을 조작하는 사람들이야말로 국가의 권력을 진정으로 지배하는 보이지 않는 정부(invisible government)’를 이룬다는 에드워드 버네이스의 말은 여전히 유효하다. 프로파간다에서 지적한 현대 민주주의 사회의 문제점은 포퓰리즘과 민심 사이에서 길을 잃은 듯하다. 여론조작은 프로파간다로 가능하다. 언론은 여론을 이끄는 대신 목소리 큰 놈에게 끌려가기도 한다. 질문할 줄 모르는 기자, 받아쓰기와 베껴쓰기로 월급을 받으면서도 부끄러움을 모르는 기자의 기사를 새겨듣는 독자가 사라진 시대는 얼마나 혼란스러운가. 트위터와 페이스북을 검색해서 뉴스를 전하면서 기자인척 하거나, 팩트 확인 없이 추측과 사견을 섞어 해설을 하는 기자는 이제 여지없이 걸러지는 시대를 살고 있다. 마치 뭘 연구하는지 모르는 연구원이 없는 연구소장이나 혼자 일하는 각종 모임과 단체의 대표처럼.

 

아날로그의 시대의 프로파간다는 디지털 시대에 비하면 땅 짚고 헤엄치기였을 것. 왜냐하면 어마어마한 정보격차 때문. 지식과 정보를 독점한 자와 그렇지 못한 자의 차이는 낮에 수평선을 본 사람과 밤에 파도소리만 들은 사람만큼 크다. 조지오웰은 모든 예술은 프로파간다다에서 천국과 지옥은 같은 곳에 있다. ‘마음의 변화가 없는 제도의 변화는 소용없다.”(41)는 말로 그 시절과 이 시대를 하나로 묶어버린다. 그렇다, 마음의 변화가 없는 제도의 변화는 소용없다. 시스템과 구조를 바꿔도 사람이 변하지 않으면 달라질게 별로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프로파간다는 어떻게 가능할까. 마음의 변화는 어떻게 가능할까. 여성운동을 예로 들어보자. 평화와 비폭력을 내세운 마틴 루터 킹과 폭력과 투쟁으로 맞선 말콤 엑스를 비교할 수 없듯 페미니즘 운동에 메갈리아는 숱한 이슈와 논란을 가져왔다. 지금도 그 논쟁은 계속된다. 시간의 문제일 뿐 변화는 계속된다. 국가의 정체, 권력구조, 경제체제도 끊임없이 변했다. 사람들의 생각도 행동도 변한다. 그러나 자연스런 변화는 없다. 생각의 전환, 실천적 행동이 이어져 변화가 일어난다. 급진적, 일시적 변화를 혁명이라 하고 점진적, 단계적 변화를 개혁이라 하자. 보다 큰 개념인 인권을 예로 들면 이해하기 쉽다. ‘사형제 폐지는 어떨까. 남성은 여성의 적인가. 물론 여성은 남성의 적이 아니다.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보편성과 범용적 원리를 들이밀지 말라는 논리는 타당한가.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셋이라면 더욱 좋고 둘이라도 함께 가자/ 앞서가며 나중에 오란 말일랑 하지 말자/ 뒤에 남아 먼저 가란 말일랑 하지 말자~’ 김남주의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은 이렇게 시작한다. 프로파간다는 더 많은 사람들에게 더 큰 효과를 거둘 수 있는 가장 쉽고 빠른 방법이다. 그 방법의 핵심은 제도의 변화가 아니라 마음의 변화. 구조를 바꾸고 시스템을 고치는 일은 늦었지만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마음을 바꾸지 못하면 시간이 더 오래 걸린다는 사실을 간과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진보는 환영이 아니며 실제로 이루어지지만, 느리게 진행되고 언제나 실망스럽다.”(42)는 말은 정운영의 심장은 왼쪽에 있음을 기억하라는 선언처럼 아프게 들린다. 사람의 마음을 바꾸고 생각을 바꾸고 행동을 바꾸는 게 프로파간다다. 조지 오웰은 모든 예술은 프로파간다다. 디킨스 본인도, 빅토리아 시대 대다수 소설가도 이를 부정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다른 한편 모든 프로파간다가 예술은 아니다.”(78)는 말로 흔들리던 시대의 예술을 평가한다. 아날로그 시대의 소설은 그대로 가공할 무기였다. 글을 쓰는 사람들의 영향력은 지금과 다른 양상이었다. 인간에 대한 통찰력, 세상을 보는 안목이 남달랐다. 그들의 말이 항상 옳고 선경지명을 가졌다는 말이 아니라 다른시선으로 사람들에게 변화를 요구했다는 의미다.

 

예술은 글 쓰는 사람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20세기를 여는 영화예술은 텍스트와 다른 힘으로 대중을 쥐고 흔들었다. 그것은 이성과 논리에 호소하는 방식대신 마음을 움직이는 방식을 택했다. 찰리 채플린은 삼류 슬랩스틱 코미디의 달인이 아니다. 조지 오웰은 이 책에는 단 한편의 영화 이야기가 나온다. 위대한 독재자가 바로 그 영화다. 부분적으로만 봤던 영화 전체를 다시 봤다. 채플린은 영화 천재가 맞다. 영화 말미에 나오는 연설만 들어보자.


위대한 독재자》 마지막 연설

 

찰리는 모두가 예상하는 연설 내용과는 달리 민주주의와 관용, 상식적인 예의를 지지하는 투쟁 연설을 인상적으로 펼친다. 아주 대단한 연설로 링컨의 게티즈버그 연설을 헐리웃 영어로 바꿔놓은 형태라 할 수 있었는데, 나로서는 오래간만에 들어본 아주 강렬한 프로파간다였다.”(204)는 평가처럼 이 책의 제목을 압축적으로 전달하는 예술은 찾기 힘들다. 선언적 의미의 민주주의, 자유, 평화, 인권, 평등에 대한 가치 기준은 사람마다 조금씩 다르다. 프로파간다는 20세기 예술의 전유물이 아니라 여전히, 앞으로도 지속되야 할 예술의 가치를 의미한다.

 

많은 사람들이 책을 읽고 글을 쓴다. 매일 쏟아지는 책과 텍스트는 개인적 기록으로 의미 있는 비평으로 예술 작품으로 남는다. 그러나 그 가치또한 프로파간다가 아니면 인정받을 수도 없고 그 판단 또한 모호하며 기준 또한 점점 희미해진다. 러디어드 키플링, T. S. 엘리엇, 살바도르 달리, 조나단 스위프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예술가들에 대한 조지 오웰의 평가는 나는 왜 쓰는가에서 말한 대로 정치적이다. 어떤 예술이 프로파간다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마는.

 

소련은 고속 성장을 보이는 대국으로 과학 연구자들에 대한 수요가 급격히 높아졌기 때문에 그들을 후하게 대우한다. 심리학과 같은 위험한 학문을 가까이 하지 않는 한 과학자에게는 특권이 주어진다. 반면 작가는 극심한 박해를 당한다. 일리야 예렌부르크나 알렉세이 톨스토이 같은 문학 매춘부들은 막대한 돈을 받고 있지만 그와 같은 작가들에게 유일하게 가치 있는 것, 즉 표현의 자유를 빼앗기고 있다. - 341

 

 

조금이라도 가치를 지니는 작가의 글은 언제나 온전한 자아가 만들어내는 산물이어야 하며, 이 자아는 한쪽에 비켜선 채 진행되는 일을 기록하고 그 일의 필요성을 인정하면서도 그 일의 진정한 본질에 대해 결코 속지 않아야 한다. - 3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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