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소설이 아니다 - 프랑스 창비세계문학 단편선
드니 디드로 외 지음, 이규현 엮고 옮김 / 창비 / 2010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것은 왜 파이프가 아니란 말인가

 

하늘에서 떨어지는 물방울들을 라고 하자. 언중言衆들이 모두 라고 했으면 는 비가 아니라 가 된다. 지시하는 언어[형식]와 대상[내용] 사이에는 필연적 관계가 성립하지 않는다. 세상의 모든 만남이 숙명을 가장한 우연이듯이. 이를 언어의 자의성恣意性이라 한다. 이름을 떠올리면 이해가 빠르다. 돌은 한국에서만 돌이다. 미국에서는 스톤이라 부른다. 언어학자 소쉬르는 이를 기표(記標, 형식, signifiant 시니피앙)와 기의(記意, 내용, signifié 시니피에)라고 명명했다.

  

르네 마그리트의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는 그림은 이미지의 배반이다. 이것이 파이프가 아니면 무엇인가? 그림은 사물의 재현이다. 당연히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라 파이프를 그린 그림이다. 파이프의 재현일 뿐. 글과 그림을 분리해 보자. ‘이것은 무엇을 지시하고 있는가. 파이프를 그린 그림과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는 문장과 평면의 종이만 남는다. 그림으로 보여주려는 파이프와 추상적 개념으로 기표와 기의 사이에 약속인 텍스트는 상호 연관성이 없다. 파이프 그림과 텍스트는 캔버스 안에 동시에 놓여 있으나 이질적이다. 미셸푸코는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에서 이 그림은 칼리그람(+그림)이다. 보여주는 것과 말하는 것을 은폐하기 위해 서로를 포개어 놓았다라고 지적한다. 글과 그림을 은폐한다는 말은 이중적 의미를 갖는다. 숨김과 드러냄이라는 표면적 의미와 글과 그림 사이의 차이를 드러내기 위한 장치다.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라는 선언은 기존 질서에 대한 통렬한 반성이다. 관습적 사고에 대한 경고다. 플라톤의 동굴의 우상처럼 우리는 벽에 비친 그림자를 실재한다고 믿는다. 교육 제도, 정치적 이념은 말할 것도 없고 윤리와 종교적 교리도 마찬가지다. 모두가 그렇다고 믿는, 대다수가 인정하는 이념과 가치는 언제나 위험하다. 당신의 자유의지가 또한 그러하다.

 

이것은 소설이 아니면 무엇인가

 

드니 디드로의 이것은 소설이 아니다는 소설인가 아닌가. 소설이란 무엇인가. 300년의 간격을 두고 발생한 용어인 꽁뜨conte와 누벨nouvelle은 어떻게 다른가. 소설의 이론을 소설로 보여주는 것은 가능한가. 반성적 사고는 새로운 출발의 전제 조건이다. 디드로는 기존의 소설에 반기를 든다. 소설다운(?) 소설이 무엇인지에 대해 말하면서 스스로 단편소설의 전형을 보여주려는 시도는 자기부정이다. 의심과 질문, 자기부정이 결여된 진보는 가능하지 않다.

 

프랑스의 단편들은 미국, 스페인라틴아메리카, 영국을 거쳐 오며 느꼈던 소설과 차이가 크다. 라틴아메리카의 환상적 리얼리즘과 또 다른 환상과 현실의 공존이다. 현대소설은 현실에 있을 법한 이야기, 즉 개연성 있는 허구를 전제로 한다. 소설의 형식과 내용을 한정짓는 어리석은 이론을 들추자는 말이 아니다. 적어도 근대 이전의 서사문학과 다른 특징에 대한 이야기다. 꿈과 환상의 나라로 떠나는 여행은 여전히 계속되지만 프랑스의 단편들은 현실과 환상이 공존하며 독자를 혼란스럽게 한다. 고전소설의 전매특허인 데우스 엑스 마키나deus ex machina’로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과 구별되는 혼란이다. 발자끄의 붉은 여인숙과 메리메의 푸른 방은 그 자체로 사건의 재미를 보여주지만 문신론자들의 저녁식사, 씰랑스, 코프퓌아 왕에 이르는 동안 내용은 고사하고 소설을 읽는 재미를 느낄 수 없었다. 끌레지오의 륄라비와 블랑제의 낙서에 이르러 겨우 정신을 차렸다.

 

언어 자체가 환상이다. 소설은 세계를 재현하는 데 목적을 두지 않는다. 소설은 세계를 창조한다. 프랑스의 단편을 읽는 동안 지금-여기의 관점으로 세계문학을 읽으려는 어리석음이 그때-거기의 모습을 들여다보려는 욕망을 앞섰다.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리는 봄 밤, ‘사랑이 상대방을 자유롭게 내버려두는 것이라면 누구도 그녀를 나보다 더 사랑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블랑제, 낙서, 458)라는 낙서만 남았다. 멀리 신호등에 걸린 자동차의 붉은 등이 흐릿하다. 일단 멈추지 않으면, 달리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는다. 어둔 밤길 조심.

 

나는 밤을 열렬히 사랑한다. 사람들이 조국과 애인을 사랑하듯 나는 본능적이고 물리칠 수 없는 깊은 애정으로 밤을 사랑한다. 내 모든 감각으로, 밤을 보는 내 눈으로, 밤을 호흡하는 내 후각으로, 밥의 정적을 듣는 내 귀로, 어둠이 어루만지는 내 살갗 전체로 밤을 사랑한다. - 모빠쌍, , 23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