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신성한 모독자 - 시대가 거부한 지성사의 지명수배자 13
유대칠 지음 / 추수밭(청림출판) / 2018년 2월
평점 :
세상에는 여러 종류의 사람이 존재한다. 단일한 사건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관찰하면 놀랍다. 일반적으로 동일한 팩트, 서로 다른 분석과 비판일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주장하는 팩트 자체가 다르고 같은 증거와 사실 관계를 보는 눈 자체가 이미 ‘객관’과 거리가 멀다. 확증 편향을 가진 사람들끼리의 설전은 지옥이다. 어떤 사실이 밝혀져도 어떤 증거가 나와도 생각을 바꾸지 않으며 인정할 줄 모른다. 그래서 나는 신념이 강한 자를 믿지 않는다.
언론과 SNS에 노출되는 정보를 보며 흥분하는 사람들을 보면 이해할 수 없다. 아니 이해할 필요도 없다. 동일한 사안에 대해 사람들이 다양한 의견을 갖는 게 당연하다. 그런데 놀라운 건 같은 사람의 논리적 판단 근거가 매번 달라질 때다. 사형제에 찬성하는가? 인간은 누구나 기본적으로 태어나면서 누려야할 권리, 즉 인권을 가진 존재인가? 언론은 비판 기능을 수행해야 하는가? 검찰과 경찰은 권력이 아니라 민중의 편에 서야 하는가? 소통과 배려의 가치는 언제나 유효한가?
유대칠의 『신성한 모독자』는 최근 읽은 책 중에 단연 최고다. 곧바로 슈테판 츠바이크의 『다른 의견을 가질 권리』가 떠올랐다. 물론, 칼뱅에 맞선 미카엘 세르베투스가 이 책에도 등장한다. 열세명의 신성한 모독자는 중세 천년 역사의 이단아들이다. 지금처럼 ‘다양성’을 존중해야 한다는 생각을 누구도 하지 않았던 시절이다. ‘민주주의’라는 말은 들어본 적도 없는 신성神性한 시대를 떠올려보자. 21세기의 아웃사이더들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시대적 배경 때문에 더욱 신성神聖한 열세명의 면면을 살펴보자.
‘아집我執’이란 변하지 않으려는 욕심이다. 과거의 모습에서 벗어나지 않으려는 자기 욕심의 중력이다. 그리고 많은 이들은 이러한 아집으로 살아간다. 그것이 편하다. 원래 있던 그대로 있는 것이 편하다. 굳이 다르게 되는 것보다 익숙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이 편하다. 오늘도 어제처럼 살고 내일도 어제처럼 사는 것이 편한 사람들이 많다. 생각보다 너무나 많다. - 95쪽
에리우게나, 이븐 시나, 로저 베이컨, 오컴의 윌리엄, 조르다노 브루노, 갈릴레이, 데카르트, 스피노자 등은 철학과 역사를 뒤적이다 한 번쯤 만났던 사람들이다. 이들은 왜 개인적 이익에 반하는 생각과 행동으로 성공, 명예, 부, 권력을 뒤로했을까. 바보 천치가 아니라면 어떤 말과 행동, 어떤 처세가 세속적 성공을 가져다주는지 알 만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왜 모두가 ‘예’라고 할 때 ‘아니오’라고 말했고, 모두가 아니라고 말할 때 그렇다고 외쳤을까. 가진 자, 권력자, 기득권층에서 이들은 고집스런 인물들이었을 게다. ‘진리’를 무기로 자기 확신에 찬 사람의 신념을 바꿀 수 있는 건 물리적 폭력과 세속적 비난이 아니다. 열세명의 신성한 모독자들은 신의 권위에 도전한 오만한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은 이성이 시키는 대로 합리적 사고에 따라 생각하고 말할 줄 아는 아주 단순한 사람들이었다.
좋은 게 좋은 거다, 튀지 마라, 가만히 있어라, 중간만 해라, 모난 돌이 정 맞는다, 누구한테 싫은 소리 하지 마라, 어른들 얘기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생긴다, 부모가 자식 잘 되라고 하는 말이다, 너도 나이 들면 알게 된다, 먼저 살아본 사람 말 들어라......
귀를 막고 눈을 뜨게 하는 건 이런 말을 듣고 자란 환경과 무관하다. 책 속에서 길을 찾는다는 건 콜린 윌슨의 『아웃사이더』를 읽고 왜 나는 다른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싶은 자괴감을 느끼는 일이다.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다른 의견을 가질 권리를 내세우는 일이다. 긍정과 희망과 순종은 주체성과 거리가 멀다. 맹목적 비판과 부정적 시선이 아니라 합리적인 판단, 이성적 사고, 논리적 사유를 통해 얻은 선택과 행동은 신성한 모독자들의 공통점이다. 이런 삶은 개인적으로 불행하다. 행복한 일상과 거리가 멀 수도 있음을 알기 때문에 사람들은 외면하는 것일까.
생각보다 현실은 단순하다. 이런저런 문제들로 복잡해 보이지만, 사실 누군가의 이기적 욕심을 가리기 위한 ‘의도된 복잡’일 수 있다. 사실 진리는 단순한데 그 진리를 숨기기 위해 어렵고 복잡하고 까다로운 말들을 늘어놓는 것을 흔히 보게 된다. 그 복잡한 이야기들은 결국 누군가의 욕심을 감추기 위한 ‘의도된 가리개’일 때가 있다. - 113쪽
백미터 달리기 출발 신호를 기다리며 들었던 두근거리는 심장소리. 조금이라도 더 빨리 도착하고 싶은 열정과 기다림. 잊었던 기억이 떠오른 이유는 신성한 모독자들의 치열함 때문이었다. 왜 우리는 사고의 근육, 생각의 속도에 두근거리지 않을까. 신 중심 세계관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진리의 빛을 따라가야만 했던 사람들에게 내적 갈등과 심리적 고통이 없었던 게 아니다. 그들은 신의 존재가 아니라 성직자와 권력자들이 내민 눈가리개를 거부했을 뿐이다. ‘있음이 곧 하느님이다.Esse est Deus.’(마이스터 에크하르트, 149쪽)라는 말은 가장 근본적인 문제를 꿰뚫는다. 가난한 자, 힘없는 자, 병든 자를 위한 종교의 타락은 성직자, 권력자를 위한 도구로 변질된다. 생각하지 않고 행동하지 않은 대가는 고스란히 민주사회에서 유권자의 피해로 돌아오고, 견제와 감시 장치가 결여된 권력은 절대 부패한다는 자명한 사실을 왜 인정하지 않는 걸까. 박근혜와 이명박은 안 되고 노무현과 문재인은 괜찮고? 비판과 감시 기능에 문제가 생기고 유권자의 입에 재갈을 물리는 순간 vice versa!
‘의심’은 새로운 세상의 시작이다. 다르게 생각하면 오랜 과거의 끝이다. 작은 의심은 오랜 시간 유지된 과거의 견고함에 작은 균열을 일으킨다. 의심 자체가 이미 한 시대의 붕괴이자 새로운 시대의 시작을 의미한다. - 183쪽
양비론과 양시론만큼 위험한 건 모두 까기다. 그보다 더 위험한 진영논리와 맹목적 신뢰다. 유대칠이 열세명의 신성한 모독자를 내세워 이야기하고 싶었던 건 중세 천 년의 역사와 철학이 아니라 지금 여기 우리들의 행복이 아니었을까. 그 행복의 방식은 사람마다 다르겠으나, 그 행복의 조건은 언제든 달라질 수 있으나 지금까지 ‘철학’이 안내한 행복은 질문과 의심이다. 길들여지지 않는 자유와 절대 고독이다. 그런 아웃사이더들이 세상을 조금씩 바꿨고 사람들에게 아주 작은 이야기를 들려줬으며 그들이 안내한 길을 우리는 여전히 걷고 있다.
우리 모두 이단이 되어야 한다. 지금 우리가 믿는 게 무엇이든 그 신성함을 깨뜨리지 못하면 미래는 밝지 않다. 만들어진 길만 걷는 사람, 주어진 조건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 다른 길을 생각해 보지 않는 사람은 신성한 모독자와 거리가 멀다. 순종적인 사람, 적응이 빠른 사람을 이단이라고 하지 않는다. 먼 훗날 가지 않은 길에 대해 아쉬움이 남겠으나 후회하지는 말자. 그 길도, 이 길도 아닐 수 있겠지만 사유하지 않고 변화를 꿈꾸지 않는다면 거기 멈춰 침묵할 것.
참다운 철학은 바로 이렇게 세상을 바꾸기 위한 외로운 외침이다. 권력자들과 다투고 싸우기에 철학은 참으로 무력해 보일지 모른다. 때로는 싸우는 과정에서 상처받고 버림받고 실패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철학은 실패마저도 흡수하여 자신의 존재 방식으로 삼는다. 그 실패로 얻게 된 고통도 자신의 존재를 자각하고 이해하기 위한 것이다. 고통을 통해 아직 더 많은 것을 해야 할 존재의 이유를 더욱 강하게 자각하는 것이 참다운 철학의 힘이다. - 31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