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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틴어 수업 - 지적이고 아름다운 삶을 위한
한동일 지음 / 흐름출판 / 2017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Vulnerant omnes, ultma necat.
모든 사람은 상처만 주다가 마침내 죽는다. - 254쪽
“공부한다는 것, 살아간다는 것은 우리 마음속의 아지랑이를 보는 일입니다. 그리고 이 단어가 원래 의미하는 대로 ‘보잘것없는 것’, ‘허풍’과 같은 마음의 현상도 들여다보기를 바랍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는 선생님을 만날 수 있는 행운은 아무에게나 주어지지 않습니다. 세상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무언가를 가르치려 들지만 배우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라틴어를 기막히게 가르치는 교수법의 달인이었다면 한동일의 『라틴어 수업』은 다른 내용이었을 겁니다. 한때 지나가는 바람인지 오래오래 대기를 순환시킬만한 움직임인지 지켜보는 일은 생각보다 어렵습니다. 이 책도 그랬습니다. 베스트셀러에 대한 호기심과 매번 부딪치는 실망감 사이에서 자신을 원망하기도 합니다.
넉넉하게 점수를 주자면 배울 게 없는 책은 없습니다. 책의 형태로 묶였다면 굳이 욕할 필요도 없이 나름의 장점이 있을 겁니다. 단 한 가지라도. 하지만 책을 고르고 돈 들여 구입하고 시간을 내 읽는 수고를 갈음할만한 배움도 깨달음도 감동도 없을 때가 더 많습니다. 제 평가가 짠 탓은 아마도 기대가 크고 늘 두근거리며 무언가 배우고 싶은 열망이 있기 때문이겠죠. 한동일 선생님은 수강생에게 어떤 이야기를 어떤 목소리로 들려주었는지 모르지만 제가 책으로 만난 ‘라틴어 수업’은 전공과 이력이 주는 희소성, 오프라인 수강생의 반응이 더 커보였습니다. 기대가 너무 컸던 탓입니다. 아마 어떤 독자도 이 책을 통해 라틴어에 대한 호기심과 관심을 기대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문법 체계와 교수법을 공부하고 싶었던 독자가 있었을까요. 쉽게 접하지 못하는 라틴어 문화권의 ‘이야기’가 궁금했을 겁니다. 제가 그랬거든요. 그 기대만큼은 충분히 충족할 수 있는 책입니다. 한 편 한 편의 이야기가 라틴어 단어 하나, 문장 하나를 통해 자세한 설명을 들을 수 있으니까요.
이 책이 좋았던 건 한동일의 태도였습니다. ‘공부한 사람의 포부는 좀 더 크고 넓은 차원의 것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나만 생각하기보다 더 많은 사람, 더 넓은 세계의 행복을 위해 자기 능력이 쓰일 수 있도록 하겠다는, 한 차원 높은 가치를 추구했으면 좋겠습니다. 배운 사람이 못 배운 사람과 달라야 하는 지점은 배움을 나 혼자 잘 살기 위해 쓰느냐 나눔으로 승화시키느냐 하는 데 있다고 생각합니다.’라는 말이 얼마나 좋은가요. ‘배워서 남 주는’ 그 고귀한 가치를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 진정한 지성인이 아닐까요? 공부를 많이 해서 지식인을 될 수 있으나 그 지식을 나누고 실천할 줄 모르면 지성인이라고 하기 어렵습니다. 너무나 당연한 말이지요. 제 한 몸 출세를 위해 몸부림치고, 제 가족의 잇속을 챙기고, 입으로는 그럴듯한 가치를 내세우면서 부와 명예를 챙기는 사람을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훨씬 많습니다. 진보와 보수, 젊은이와 노인, 여자와 남자, 기독교와 불교, 한국과 미국, 백인과 흑인 가릴 것 없습니다. 사람은 저마다 다른 ‘프레임’으로 세상을 봅니다. 이념, 종교, 직업, 나이, 성별, 학벌, 인종, 국가......그게 무엇이든 틀렸습니다. 나눔과 실천, 배려와 소통은 입으로 내세울 수 없습니다. 제가 가진 인간에 대한 평가 기준은 명확합니다. 누구의 이익에 복무하는가. 이타적인 삶, 이웃을 위한 희생, 더 나은 가치를 위한 실천 등 보통 사람이 흉내내기 어려운 삶의 목적을 설정했느냐를 따지는 게 아닙니다. 결국 ‘자신의 이익’을 위해, ‘출세와 명예’를 지키고, ‘돈’이 되는 쪽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너무 많이 본 탓일까요. 진영 논리도, 이념의 잣대도 이 큰 틀을 허물지 못합니다. 어디든 분쟁이 생기고 갈등이 심화되고 고통이 따르는 이유는 욕망과 이익 때문이 아닐까요. 그래서 한동일의 라틴어 수업을 읽는 동안 마음이 조금 맑아지는 느낌이었습니다. 출판사가 내세운 동아시아 최초 바티칸 대법원 로타 로마나 변호사라는 타이틀 운운이 아니라 스스로 ‘공부하는 노동자’로서 자세를 바로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마음이 그 태도가 물론 수강생과 독자들에게 전달되었다고 믿습니다.
최소한 ‘Do ut Des’ 정도만 지켜도 세상은 달라집니다. 기브 앤 테이크give and take가 한국인의 정서에는 야박한가요. 한국 사회에서 성장하고 배우고 벌었다면 그만큼 돌려주는 게 예의입니다. 그것이 지식이든 명예든 금전적 이익이든 말입니다. 저 혼자 잘나 그 자리에 오른 줄 아는 사람의 착각은 도 우트 데스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할 겁니다. 이 책에는 우리가 일상에서 사용하는 경구도 많이 등장합니다. 익숙한 문장이 라틴어에서 파생되었든 어느 지역에나 있는 금언이든 상관없습니다. 한동일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그저 살아가는 일이란 수천 년 전 라틴어를 사용하던 로마 사람들이나 한국어를 사용하는 우리들이나 별반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우리가 라틴어의 단수, 복수, 남성, 여성, 중성에 따른 격변화 단어를 어디에 쓰겠습니다. 한글이 얼마나 위대한 글자인지 다시 확인하는 데 도움이 될 뿐입니다. 하지만 언어는 사고입니다. 그 자체가 생각의 틀입니다. 라틴어가 가진 특성이 문화이고 그들의 생각이며 문명의 기틀입니다. 한국어도 마찬가지일 테지요. 여러 사람이 지적했지만 개인적으로 저도 늘 안타깝게 생각하는 한국어의 약점은, 다른 사람들은 그것이 동양 문화의 미덕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존대법’입니다. 직장의 회의 장면을 떠올려 보세요. 예를 들어 직급이 낮은 사람은 ‘부장님 제 생각은 좀 다릅니다.’라고 말해야 합니다. 하지만 직급이 높은 사람은 ‘야! 쫌!’ 12글자와 두 글자, 아니 ‘쫌!’ 한 글자면 어떨까요. 과장해서 표현했나요. 의사표현 도구로서 언어는 출발부터 다릅니다. 평등하지 못한 인간관계 자기 생각을 말하고 표현하고 감정을 드러내는 데 익숙하지 않은 이유는 잘못된 교육, 가부장적 사회구조, 수직적 직급체계, 장유유서에 대한 사회적 관습 등 다양한 요소 때문이겠지만 그 출발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불평등한 ‘관계’ 때문이 아닐까요. 자신의 노력으로 얻은 게 아닌 ‘나이, 성별, 외모, 국적, 부모의 직업, 출신지역......’ 등은 어쩔 수 없는 운명이면서 차별을 구조화하는 도구로 활용되어서는 안 될 요소들입니다.
이 세상에서 라틴어가 가장 우수한 언어라서 그 정신과 문화를 배우기 위해 이 책을 읽는 건 아닙니다. 낯선 곳에 대한 호기심, 시간을 견뎌낸 언어가 안고 있는 문화와 전통, 그것이 지금 여기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 살펴볼 뿐입니다. 물론 제가 밑줄 친 곳은 뻔합니다. 이 책을 읽은 다른 분들은 어떤 라틴어 문장에 밑줄 그었는지 궁금합니다.
In omnibus requiem quaesivi, et nusquam inveni nisi angulo cum libro.
내가 이 세상 도처에서 쉴 곳을 찾아보았으되, 마침내 찾아낸, 책이 있는 구석방보다 더 나은 곳은 없더라. - 토마스 아 켐피스(1380~1471), 독일의 수도자이자 종교사상가, 182쪽